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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대부터 조선까지 정리

안녕하세요 림쌤의 10분 역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역사 학스 가이드 림 쌤입니다 이번 시간엔 정말 요청이 많았던 고등한국사 단원별 총정리를 준비해 봤는데요 사실 고등 한국사는 소 단원별로 워낙 내용이 방대해 그래도 최대한 압축해서 정리했으니까 집중해서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일단원 전체 총 정리부터 시작해 볼까요 먼저 1-1 고대 국가의 지배 체제입니다 이 단원은 선사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는 단어인데요 선사 시대는 워낙 쉬우니까 빠르게 정리해 볼게요 한반도의 구석기 약 70만 년 전에 시작됐고요 댄 서기를 사용했습니다 대표적인 댄 석기로 주먹도끼가 있겠죠 그리고 구석기 수렵과 채집 이동 생활 무리 생활이 핵심입니다 다음 신석기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됐으며이 시대때의 핵심은 농경 과 목축의 시작입니다 도구는 간석 이고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생활을 했고 시족 사회에서 점차 부족 사회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빗살무늬 토기 같은 토기도 사용했었죠 그리고 청동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에는 비파형 동검이 있는데요 청동은 워낙 기기 때문에이 시대 때도 일상 생활에서는 반달칼 같은 정교한 간석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부터 계급이 출연했고 지배자가 등장하며 군장 국가가 형성됐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바로 고조선이 마지막으로 철기 시대 철기 시대부터는 철제 무기는 물론 철제 농기구가 사용됐고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많아졌고 활발한 정복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여러 연맹 왕국이 등장하며 고대 사회가 발전해 나갔습니다 자 이렇게 구석기부터 철기 시대까지 간단하게 살펴봤고요 다음으로는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에 대해 알아볼까요 고조선은 여러 부족간의 통합을 통해 성립된 군장 국가로 당군 왕검이 건국했습니다 이러 고조선은 제사장이 곧 정치 지도자인 제정일치 사회였고 랴오닝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요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알려주는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이 있습니다 또 고조선에서 부왕이 준황 등이 왕위를 세습하기 했고요 왕의 세력을 뒷받침해 주는 관직으로 상대부 장군 등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 하면 역시나 팔조법이 팔조법 상당히 보복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데요 사람을 죽인 자를 즉시 죽이고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는 등의 내용을 통해 당시 고조선이 생명과 노동력을 중시한 농경 사회였다는 걸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조선은 위만이 집권하면서 중개 무역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결국 한해 침입으로 멸망했고 이후 한반도에는 여러 나라들이 등장했습니다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부여 고구려 옥저 동해 그리고 마한과 진한 변한이 있는데요 마한과 진한 변환을 합쳐서 사안이라고 합니다 이들 중 부여와 고구려에 만 왕이 있고요 나머지는 군장이 다스리는 사회였습니다 특히 부연은 왕을 중심으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네 개의 가들이 모여 있는 오부족 연맹체 있고요 각 가들이 다스리는 지역인 사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역시 왕이 있고요 전로 개로부터 사자와 조이 선인들의 관리를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옥자와 동해는 왕이 없고요 읍군 또는 로라 불리던 군장이 부족을 다스리다가 이후 고구려에 흡수됐다 남쪽에 위치한 만에는 수십개의 소국이 존재했는데 이중 목지국의 지배자가 사만을 주도했습니다이 사만 역시 군장 국가고 군장 을 신지 또는 읍차 아고 불렀습니다 또 특이하게도 제사장인 천군이 따로 존재하는 재정 분리 사회였는데 청군이 제사를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도 함부로 할 수 없을만큼 천군의 권위도 막강했습니다 이러한 사만의 소국들 중에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백제와 신라가 성장한 건데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3국시대 들어가 볼게요 고구려의 성립은 앞소 소개해 드렸고요 백제요이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의 유민이 한강 유역에 토착세력 과 건국한 나라고 도읍지는 하남의 위례성이었습니다 한편 지난해 소국 중 하나였던 신라는 4세기 전반까지 박석김 세계의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이 됐습니다 이처럼 삼국시대 초기는 강력한 부의 대표가 왕이 되는 연맹 왕국의 성격이 강했고요 각 부는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중대사는 왕과 부의 대표가 함께 회의를 통해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삼국의 회의론은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가 있고요 특별히 신라의 화백 케이는 만장일치제 있습니다 한편 변환의 여러 소국들은 연맹 왕국인 가야를 형성했는데 철을 바탕으로 성장한 가야는 초기엔 금강 가야를 그리고 후기엔 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삼국이 성립된 이후 고구려는 도읍지를 국내성으로 옮기고 1세기 후반 태조왕 때는 옥저를 4세기 미천왕 때는 낙랑군을 추출하며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3세기 고이왕 때 관제와 건복 도입해 국가의기를 마련했 마의 지국을 공격해 한강유역을 장악했습니다 이렇게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부터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아 마한 전체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동진과 외 아는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한편 신라는 4세기 후반 내무 태가 돼서야 비로소 김씨의 왕위 세습을 확립하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고요 대장이란 뜻에 마관을 왕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각각 고대국가의기를 마 삼국은 서로 항쟁을 이어가며 성장했는데요 먼저 고구려는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소수리 망이이를 잘 극복한 뒤 불교 수용과 율령반포 태약 설립 등의 정책으로 고구려의 중앙 직권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등장한 광계토 대왕은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신라에 침입한 외를 격대 신라의 영향력을 행사했고 오등 반도와 만주 1대를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적극 적인 남진 정책을 펼쳐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강유역 전체를 차지했으며 남한강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처럼 5세기 한반도의 주인공은 고구려 있는데요 이러한 고구려의 팽창 정책으로 한강을 뺏긴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했다 꿈꾸며 22담로에 설치해 왕권을 강화했고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천도에 개혁 정치를 펼쳤습니다 이때 상황은 22부 중앙 관청과 함께 중앙의 5부 지방의 방을 설치했고요 신라와 연합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재탈 했지만 결국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한편 6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앙 직권 체제를 확립한 신라는 지증왕 때부터 왕이라는 칭호와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법대는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에 국가체제를 정했고요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고 병부와 상대 등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지능이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신라 의 전성기를 누렸는데요 남으로는 대가야를 병합하고 북으로는 함흥 평양까지 진출했습니다 이러한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알려주는 비석에는 북한산 순수비 단양 적성비 등이 있었죠 그리고 또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했는데이 화랑도가 이후 삼국 통일에 기반이 되어주었습니다 다음은 삼국의 관등제 기족 회의를 좀 살펴볼게요 제가 앞서 소개해 드렸던 3국의 회의들이 이후 기족 회의로 자리 잡았는데요 이중 고구려의 기족 회의는 제가 회이 그요 수장은 대대로 관등 10여관등 있니다 그리고 백제의 정사 회의는 상자을 수장으로 자평 형태의 관등제 마련했고요 신라의 화백 케이는 상대 등을 수장으로 17 관등제 정비했습니다 이러한 고대 사회는 철저한 신분 사회로 크게 지배층인 귀족과 피지배 층인 평민과 천민이 있고요 이러한 신분은 세습 됐습니다 이중 대표적인 신분 제도가 바로 신라의 골품제요 골품제는 성 골과 진골 그 아래로 6두품 터 1두 din 아지의 서열이 있는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의 신분 제도입니다 이건 골품제 상징하는 도표들 시험에 잘 인용되는 잘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고대의 경제에서는 고구려의 진대법 정도는 기억해 주셔야 됩니다 진대법을 봄의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농민 안정세 이었죠 그리고 고대의 수치 제도인 조세 공납 역 여기서 조세는 토지세 그요 공납을 특산물 역은 노동력을 뜻합니다 자 이렇게 수치 제도까지 삼국 시대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그럼 이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6세기 진흥왕의 전성기가 지나고 7세기에 들어선 신라는 백제의 반격으로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결국 신라는 당과 연합에 나당 동맹을 체결했고 이러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면 660년 백제가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668년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고구려 역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면 망했고요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역시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신라와의 약속을 깬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해 나당 전쟁이 일어났는데요 이때 실라가 매소성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며 삼국통일을 완수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러한 신라의 삼국통일은 반쪽자리 통일이었다 한계를 벗어날 순 없겠죠 암튼 이렇게 성립된 통일신라는 신문왕 때 전성기를 누렸고 신문은 통일 라의 통치체제를 정비했습니다 특히 신문왕은 왕권강화에 힘써 왕의 비서 기관인 집사부 집사부의 최고 관직인 시중의 권한을 높이고 화베 케이와 상대 등의 권한을 낮췄습니다 거기에 감찰 기구로 사정부 외사 정을 설치해 귀족들을 견제했고 육두품 등용하고 국가 최고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했습니다 또 관리들에게 지급하던 노급 패치하고 관료전을 지급했는데요 이로 인해 귀족들의 권한은 더욱 약화됐습니다 그리고 지방통치 체제에서는 먼저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그 아래 9년을 설치해 지방간을 파견했고 말단 행정 구역인 초는 촌주 다스리게 했습니다 또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기 위해 다섯 개의 주요 주역에 소경을 뒀는데요 이러한 통일 신라의 지방통치 체제를 구주 오소경이라고 부릅니다 아 그리고 신라에는 촌락 문서가 있었는데요이는 보다 효율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촌주 작성한 것으로 각 마을의 인구수와 가축수 토지 면적 등이 기 기록되 있습니다 그리고 상수리 제도이 상수리 제도는 지방의 천주를 일정 기간 수도에 머무르게 하는 제도고이를 통해 지방 세력을 견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신라의 군사 제도는 구서당 10정 이고요 중앙군이 구서당 지방군의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통일신라는 나름 탄탄한 통치 체대를 확립했습니다 후기에 들어선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요 지배층의 타락으로 곳곳에서 농민 본기가 일어났으며 지방 호족들이 성장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이 호족들이 결국 육두품과 손잡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게 되죠 한편 이식기 북쪽에서는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리는 이끌고 동모 산에 털을 잡아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고이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바램입니다 이러한 바에서는 세 명의 왕을 기억하시면 되는데요이 중 무왕은 당과 신라를 견제했던 왕으로 당의 산동 반도를 공격하고 흑수 마가를 제압하며 영토를 확장했고이 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문항 때는 당과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요 수도인 상경성 건설하고 대응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선왕 때 드디어 전성기를 맞았는데요 이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과 연해주까지 진출했던 발레는 해동 성국이 불렸습니다 이러한 발레의 중앙통치 체대는 삼성 6부 있고요 지방은 경 15부 6 이주로 나누고 도덕과 자사 등 관리를 파견했습니다 또 최고 교육기관으로 주자감 두어 유학을 장려하기도 했는데요 안타깝게도 10세기경 급격한 국력의 세태와 거한의 침입으로 결국 발레는 멸망했습니다 자 이렇게 구석기부터 발레까지 달려 봤는데요 여기까지가 1-1 고대 국가의 집배 체제 우리는 다음으로 1-2로 넘어가 [음악] [박수] [음악] 볼게요이 1-2에서는 고대사회 종교 사상에 대해 살펴볼 건데요이 종교라는 개념이 시작된 건 바로 신석기 시대입니다 이때부터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의 원실 신앙이 등장했고요이는 계급이 출연한 청동기 시대부터 지배층의 통치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됐습니다 특히 하늘의 초인적인 신을 숭배하는 천신 신앙이 등장했는데요 고조선이 고구려 등의 건국 신화를 보면 지배자를 모두 천신의 자손으로 강조하고 있죠 또 철기 시대의 여러 나라들은 하늘의 제사를 지내는 제 행사를 거행했는데 부여의 연고 고구려의 동맹 동해의 무천 5월과 10월에 드리던 사만의 절제가 모두 재천 행사입니다 한편 삼국에서는 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고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방식으로 천신 신앙을 이용해 왕권강화를 꾀했고 천손 사상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중국과의 대함 표방했고 그려 광계토 대학 능 비에 잘 드러나 있죠 다음은 고대의 종교 중 가장 중 중요한 불교입니다 3국 시대부터 지배층은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를 수용했는데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전진에서 불교를 받아들였고 백제는 침류왕 때 동진에서 그리고 신라는 보풍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다 보호하는 호국적 성격을 뛰고 있으며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 사장을 내세웠습니다 특히 신라의 경우 불교의 무척 적극적이었는데 왕과 불교의 전륜 선왕을 연결시키고 불교식 왕명 을 사용했으며 선덕여왕 때는 자장 법사의 권위로 황용사 구축 목탑을 만들었습니다 백제 역시 왕실 차원에서 대규모 사찰과 탑을 건립했는데 미륵사가 대표적입니다 한편 삼국의 지배 층들은 불교의 업서 이용해 신분질서를 정당화 있는데요 내가 지금 천민인 건 전생이 지은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게 해 신분질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지배층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국의 불교는 통일 신라에 들어서며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요 이러한 불교의 대중화의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원유 대사입니다이 원유의 해골물이라는 워낙 유명하죠 사실 해골물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원유가 당으로 떠나는 유학길에서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는 큰 깨달음을 얻은 건 사실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원유는 일반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교사상 대신 나무아미 타불 외워도 극락에 갈 수 있다며 아미타 사상을 강조했고요 무가라고 또 불교의 종파를 통합하기 위해 화쟁 사상과 일심 사상을 강조했고요이를 바탕으로 신문 화쟁 론을 저술했습니다 한편 이시기 활동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인 의상은 화엄 사상을 주장해 화엄종을 개창 있는데요 화음 사상이란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다라는 일즉다 다지기를 주장한 사상으로이를 바탕으로 화엄일승 법계도 아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또 의상은 현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을 내세워 관세음 사상을 을 강조했고요 부석사를 포함한 많은 사찰을 건립해 제자 양성을 위해 힘썼습니다이 원유와 의상이 비교해서 잘 나오는데요 이게 또 헷갈리니까 다시 한번 정리해 볼게요 원유는 먼저 아미타 사상과 나무아미 타브르 강조했고요 의상은 관세음 사상과 관세음 보살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원효는 화쟁 사상을 바탕으로 신문 화쟁 론을 저술했고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화엄일승 법계도를 저술했습니다 또 원유 는 무예가 의상은 부석사가 특징이었죠 잘 기억해 두세요 그리고 원유와 의상 말고도 원칙이라는 승려는 당의 현장에게 가르침을 받고 법상종의 발전에 기여했고 해초는 당과 인도를 여행하고 왕호 천축 국전이 아는 인도 불교 여행기를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또 통일신라 시대엔 불교 문화도 융성했으나 석구라이 있겠죠 한편 통일신라 말에는 기존의 교리를 중시한 교종 대신 선종이 유행했는데 선종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사상으로 혼란한 신라말의 호족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의 아홉 개의 선종 사찰이 만들어졌는데요이를 구산 선문이 하고요 이때 승려의 사리를 보관한 승탑 유행했습니다이 구산 선문 승탑은 선종을 상징하는 것들로 문제에 잘 인용되는 잘 기억해두시고 이러한 선종이 부패한 신라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상적 기반이 된다는 점도 잘 체크 세요 한편 바에서는 불교가 발달했는데 바레 역시 지배층을 중심으로 불교가 발전해 불교식 왕명을 사용했고요 수도인 경성에 많은 사찰이 건립됐습니다 이러한 발레의 불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는데요 발의 불상인 이불 병자 상이나 석등을 보면 고구려의 색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고대사회의 대표 종교인 불교에 대해 살펴봤고요 다음으로 도교로 넘어가 볼까요 독교 역시 삼국시대 중국을 통해 전래됐다는 장생과 현세 구복 추구하는 종교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도교의 흔적은 삼국문화 곳곳에 남아 있는데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남아 있는 사신도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현 무도는 고구려의 도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과 금동 대학로에서 역시 도교의 색깔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풍수지리 설인데요 신라말 도선이 들여온이 풍수지리설은 산과 하천 땅 등의 자연이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으로 신라인들의 경주 중심의 사고 방식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특히 신라말 호족들은 경주는 기운이 세 있다며 송악 길지설 등을 내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했어요 그리고 고대 사회의 사상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거 바로 유학인 국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유학 교육의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중앙의 태학과 지방의 경 등에서 유학을 가르쳤고 이중 경당에서 항문과 무술 교육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오경 박사를 두어 유학 교육을 담당했고 일본에 유학을 전수했습니다 신라 역시 유학을 열심히 공부했는데요이를 알려주는 유물로는 임신 석이 석이 있습니다 또 진흥왕 수비에서는 논어를 인용하기도 했고요 화랑도의 규율인 세소 고개에서 역시 유교 덕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의 유학은 관료의 육성과 규범의 강조 종묘 설치 등의 제도 정비에 활용됐습니다 한편 3국에서는 역사 소 편찬 역시 활발이 이루어졌는데요 먼저 고구려는 6 6이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영양 왕때 이문진 다섯 건으로 정리해 신집 편했고요 백제는 근초고왕식이 고흥이 석기를 저술했습니다 또 신라는 진흥왕 때 거칠 부에 의해 국사가 편찬되어 안타깝게도 이러한 삼국의 역사서는 모두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음은 통일신라의 유학인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사용한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 때 국가교육 기관으로 국학을 설치했고요 원성왕 때는 6교 경전에 2해 수준을 평가해 관리를 선발하는 독서 상품가를 설치했지만 원활한 시행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통일 신라에는 뛰어난 유학자 많았는데요 먼저 외교 문서에 능했던 육두품 출신의 강수와 화계의 저자인 설총이 설총은 원녀 대사의 아들로도 유명하죠 이러한 설총은 한자의음을 우리말로 표기한 이두를 정리하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 진골 출신의 김대은 화랑 세기와 고승전 등을 통해 신라의 자주적인 문화를 강조했고요 도품 출신의 최치원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여 토소 경문 등을 저술하며 이름을 날렸는데요 이후 최치원은 혼란의 신라말 진성 여왕에게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지만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라말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던 6두품은 결국 지방 족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게 되죠 마지막으로 의 유학인 바레 역시 최고 교육기관인 주자감 유학을 가르쳤고 육부의 명칭을 유교적 덕목으로 정하는 등 유학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의 시험인 빈공과에 많이 합격했고 한문학이 발달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발해의 한 문학에서는 양태 사의 씨가 유명합니다 자 이렇게 유학까지 1-1을 맞췄고요 이제 1-3 고려로 넘어가 볼게요 [음악] 이 1-3에서 n 고려의 건국과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왕들 그리고 고려의 통치 체제와 고려 전기의 대회 관계까지 살펴볼게요 그럼 바로 고려의 건국부터 시작해 볼까요 통일 신라말 귀족들의 극심한 왕권 다툼으로 왕권이 약해지고 사회가 혼란해지고 세력들이 성장했는데요 이들 중 견이 완산 주를 도읍지로 후백제를 건국했고 이러한 후백제 중국과 외교관계 를 수립할만큼 체제를 갖춘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궁에도 송악을 도지로 후고구려를 건국했고 이후 철원으로 천도에 국호를 봉으로 고치고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이후 궁예가 포악한 정치를 이어가자 결국 후고구려의 호족들은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고 왕건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다시 송악으로 도했고 호족 세력을 포섭하고 중국과 발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후백제와는 대립하고 신라와 화친 있는데요 당시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후백제 왕권 다툼이 일어나며 아들에게 왕위를 뺏긴 결원이 고려에 귀순하여 됩니다 그리고 신라의 경순왕 역시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라가 먼저 고려에 통합됐고 이후 고려군이 후백제를 격파하면서 936년 마침내 후 3국이 통일됐다 을 실시해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청천강에서 영웅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또 민족통합 정책을 실시해 신라와 후백제를 물론 발해의 유민지 포용했다 형성하고 왕씨성 하사 있고요 한편으로는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신관 제도와 기인 제도를 활용했습니다 사신관 제도는 호족들에게 사심관이라는 직책을 주고 지방 통치를 책임지게 한 거고요 기인 제도는 호족들의 자재들을 수도의 인질로 잡아둔 정책이었습니다 이밖에도 태조 왕건은 민생 안정책 백성들의 세금을 낮춰주고 빈민구제 기간인 창을 설치했습니다 또 왕건은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도리로 훈유 10조를 반했는데요 이러한 훈유 10조에는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팔간을 거행하고 서경을 중시하며 거을 배격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이를 통해 왕건이 불교를 작 하고 북진 정책을 권고했다는 걸 알 수 있겠죠 이렇게 고려를 건국하고 건국초 기틀을 다졌던 태조왕건 하지만 그회사 후 고려는 치열한 왕권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고요이를 잠재운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 등장하니 그가 바로 광종 있니다 중요합니다 광종 아면 역시나 왕권 강하죠 광종은 노비안 권법을 실시해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평민으로 풀어 줬는데요이를 통해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과거제를 도입했고이 과정에서 반발한 호족 세력을 대거 숙청하며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또 공복을 제정해 관리의 기강을 확립했다 칭하고 광덕 혹은 준풍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광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관리들에게 직역과 복무의 대가로 수조권을 지급하는 전시과를 시행했고 성종은 통치체제를 정비해 고려 사회를 안정적으로 다스 습니다 특히 성종은 최승로의 심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전국의 목을 설치해 지방관을 파견했습니다 자 이렇게 성종이 고려초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왕들에 대해 살펴봤고요 지금부터는 성종때 정비된 고려의 통치 체제에 대해 알아볼게요 먼저 중앙통치 체제입니다 고려의 중앙통치 체제는 이성 6부로 당과 송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중 이성은 중서 문화성 상서성 중서 문화 성은 국정을 총괄하고 정책을 심히 결정하는 최고 중앙관서 있고요 중서문하성의 관료로 정책을 결정하는 재신과 정치의 잘잘못을 비판하는 낭사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서성 정책 집행기구 상서성 밑으로 이병 호형 예공이 육부가 있었고요 이들이 실제 정무를 담당했습니다 또 왕의 비서 기관인 중추원 있는 군사 기미를 담당하는 추밀 왕명을 전달하는 승선이 있었고요 어사대 아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 라는 감찰 기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사대 중서 문화 성의 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리며 왕권을 견제했고 간쟁 봉박 석경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이 간쟁이란 건 왕의 잘못을 논하는 것이고 봉박 합당하지 않은 왕의 명령을 되돌려 보내는 것 그리고 석경은 관리 인명이나 법령 재정에 동의하는 권한을 말하는데요 이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대가는 일종의 언론 기구였다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사라고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회계 기구도 있었는데요 요거 조선의 삼사랑 헷갈리니까 잘 기억해 두세요 한편 고려에는 고려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회의 기구로 도병 마사와 식목 도감이 있었는데요이 도병 마사와 식목 도감은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미 이하는 고위관료들의 회의였다 마사에서 국방 문제를 식목 도감에서는 제도 정비 등을 논의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지방행정제도이 고려는 전국을 오도 양기로 나눠 다스렸는데 처음 성 되는 목을 설치해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후 경기와 오도 연계로 골격을 갖췄습니다 이중 5도는 일반행정 구역으로 중앙에서 각 도마다 안찰사 파견했고도 아래 주군 현을 설치했습니다 이러한 구현은 지방관을 파견한 주연과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은 속현으로 구분 수 있고요 9년 아래로는 고려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를 설치했습니다 이러한 향 부곡 소는 속과 마찬가지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고요 이렇게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곳은 지방의 향리가 다스렸습니다이 향리는 지방에 남아 있던 호족 세력들로 당시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습니다 사실 고려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년보다 더 많았는데요 확실히 이때만 해도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는 못했죠 그리고 군사행정 조직인 양계는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북괴와 외국의 침입을 막기 위한 동계가 있고요이 양에는 마사가 파견 됐으며 군사 요지에는 진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또 경이라고 세개의 경을 두었는데요 이러한 경에는 개경 서경 동경이 있고요 고려 후기부터는 남경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개경 서경 남경을 경으로 중시했습니다 다음은 고려의 군사 제도인데요 고려는 중앙군 이군 6기를 두었고요 이군은 국왕의 호위를 6기는 수도와 국경을 방어했습니다 또 지방군으로 주연과 주군을 주군은 9년에 주진은 양에 주둔 한편 고려은 국가 최고 교육 기관으로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를 설립해 인재양성과 유학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관리등용 제도로는 과거와 음서 있는데요 과거는 쌍기의 권위로 광종때 만들어졌으며 제술과 명경과 잡과 과로 구성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과거에는 무가가 따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또 라고 공신이 오품 이상의 고의 관료의 자제들에게 주는 혜택이 있었는데요 이들은 따로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자 이렇게 관리등용 제도까지 고려의 통치 제도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다음으로는 고려 전기의 대회 관계에 대해 알아볼까요 고려 전기는 시기적으로 10세기부터 12세기 전반까지 볼 수 있고요이시기 동아시아는 고려와 송 거란과 여진의 다원적 국제질서가 형성된 시기였습니다 이때 고려는 송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며 송으로 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거란과 여진을 적당히 견제했습니다 또 고려는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도 독자적인 천하관을 드러냈는데요 스스로 해동 천하를 자처하며 주변의 동료인가 일본을 상대로 자국 중심의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고려은 스스로 황제 국임 강조해 황제나 천자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연호 역시 사용했습니다 특히 태조왕건의 청동상을 보면 통천관 쓰고 있는데요 이는 황제가 쓰는 관이었다 수립했고요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관군을 편성했습니다 하지만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거라는 고려를 부려 세 차례나 침입했는데 먼저 1차 침입 대는 서희의 외교 단판으로 전쟁 없이 거한을 물리치고 강동육주 획득했죠 이때 고려은 손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했는데요 하지만 고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러자 화가난 거란이 때마침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을 구실삼아 다시 한번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이게 바로 거란의 2차 침입 있데요 이때 개경이 함락하는 등 위기가 찾아왔지만 고려는 끝내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란의 3차 침입 대는 강감찬이 활약했는데요 강감찬의 기주 대첩은 워낙 유명하죠 이때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격파했고 이후 고려은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천리 장성을 한편 여진의 경우 처음에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쳤는데요 12세기 초 세력이 커지면서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윤관이 별무반을 조성해 여진을 정벌 별무반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편성된 군대였습니다 이러한 윤관의 모반은 여진을 정벌한 후 동북 구성을 축조했다 동북 구성을 반해 줬습니다 그런데 이랬던 강해지면서 금을 건국하고 거을 정하니 급기야 송을 남쪽으로 밀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고려의 대를 요구했는데요 이러한 금의 사대 요구를 고려의 지도층이 결국 받아들여 금과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때 금과의 사대에 앞장섰던 인물이 이자겸과 김부식 등의 벌들이 이들의 이야기는 1-4에서 계속 이어가 [음악] [박수] 볼게요 [음악] 자 이제 1-4 고려의 통치 체제와 국제질서의 변동 두 번째 시간으로 돌아왔고요이 단원에서는 문벌 사회의 형성부터 고려의 멸망까지 살펴볼게요 먼저 문벌 사회의 성립합니다 문벌이 란 고려의 공국 세력인 호족과 육두품이 중앙 전개를 장악한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고의 간직을 독점하며 형성된 가문을 말합니다 이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했고 고의 관료들에게 지급 공전을 통해 대토지를 소유해 나갔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왕실이나 다른 벌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자기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나갔는데요 이러한 벌들은 금과의 사대 관계를 놓고 점차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문벌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데요 이처럼 문벌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이자겸의 난이 있습니다 이자겸은 왕실과의 거듭된 혼인으로 권력을 잡은 대표 표적인 문벌이 있고요 왕실을 등에 없고 횡포를 부리던 이자겸을 인종이 먼저 제거하려고 했지만이는 실패했고 오히려 이자겸이 중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해 이자겸의 난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요 이후 또 한번 문벌 사회가 동요하는 사건이 발생하니 바로 묘청의 석경 천도 운동입니다 중요합니다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인종은 묘청과 정지상 등의 석경 세력들을 이용해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했고요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석경의 천도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금과의 사대관계를 반대하고 칭제 건과 금국 정보를 주장했는데요 하지만이는 보수적인 개경의 반대로 좌절됐고 인종마다 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으로 흔들리던 문벌 사에는 결국 무신 정변으로 무너졌습니다 사실 고려의 무신들은 문신에 비해 상당한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요 문신들의 만행이 그게 달래 무신의 수염을 태우고 따기를 때리는 등의 돌을 넘은 행동에 결국 무신들은 칼을 뽑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중부와 이방 등이 주축이 된 무신정변이 이러한 무신 정변으로 결국 문들의 시대가 끝나고 무신들의 세상이 열렸습니다 무신들의 세상도 막 장인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신 정권 초기에는 이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이 서로 실세가 되겠다며 싸우기 바빴고요 이때 최고 권력 기구는 무신들의 회의 기구였던 시기가 이어졌고요 이때 최고 권력 기구는 최충원이 만든 교정도감이었습니다 중요합니다이 교정 도감에서는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했고 거기에 최충원 경대승 때 만들었던 도방을 더욱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최우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교정 도감과 더불어 정방을 설치해 인사권을 장악하고 문신들을 등용하기 시작했고요 국정 자문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서방도 설치했습니다 또 최후는 개경의 치환을 위해야 초를 설치했는데요이는 이후 군사 기반으로 사용됐습니다 한편 무신 직 권기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는데요 하극상을 통해 정권을 잡은 무신들 신분제가 동요했고 무신들의 수탈로 농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요 농민의으로는 공주 명소에서 일어난 망이 망소이의 난과 운문 초전에서 일어난 김사미 효심의 난이 대표적입니다 또 천민의 저항으로 만적의 난이 있는데요 중요합니다 개경에서 충원의 노비였던 만적이 일으키니 나는 신분의 방을 주장한 것이 특징입니다 왕우 장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라고 외치며 새로운 사회를 꿈꿨던 만적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었죠 이렇게 무신 집권기의 고려는 나라 안팎으로 사건사고가 많았는데요 13세기 초에는 몽골이 고려해 왔던 몽골 사신의 피사 사건을 구실삼아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이러한 몽골의 침입에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지만 곧바로 파기하고 강화도로 전도했는데 이때가 최후가 집권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지도부가 항전을 명분으로 강화도로 천도해 버리자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몽골의 끊임없는 침략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때 고려의 대표적인 항전으로 박서의 귀주성 전투와 김윤우 활약한 처인성 전투가 있는데요 승려였던 김윤우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의 총사령관인 살리타 사살하고 몽골 군과의 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김연우는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도 활약했는데요이 충주성 전투는 노비들이 주축이 된 항전이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이렇게 고려의 백성들은 최선을 다해 몽골에 맞서 싸웠지만 무려 40년간 이어진 몽골의 침략에 결국 무신 정권이 무너졌고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삼별초는 끝까지 항진을 이어가는데요 삼별초는 최후가 조직한 야별초 뿌리를 두고 있고요 좌별초 우별초 신의 군을 합쳐 삼별초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와 제주도까지 이동하며 항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실패했고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이의 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원간섭기 영토가 축소되어 화주는 쌍성총관부 서엔 동부 제주엔 탐나 총감부가 세워졌고 고려 왕의 칭호와 관제도 격이 낮춰져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격화 또 원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왕 이름 앞에 충성 충자 붙였고요 고려의 왕은 무조건 원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또 고려의 중앙정치 제도인 이성 6부는 천미부 사사로 중추원을 밀 직사로 바꿔 관제에 격을 낮췄고 내정간섭 객으로 정동 행성도 생겼습니다 중요합니다이 정동 행성은 원래는 몽골이 일본 침략을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한 기구였다 가치를 파견해 고려 의 내정을 간섭했다 원은 고려에 많은 조공을 요구했고 공려 아는 이름으로 고려의 처녀들 아지 데려갔습니다 한편 고려에서는 활발한 몽골과의 왕래로 변발과 호복 족두리 소주 등의 몽골 풍이 유행했고 반대로 몽골에서는 만두와 떡 등의 고려 양이 유행했습니다 이러한 원 간섭기의 지배 세력은 친원파 있 권문세족들이 있는데요 이들은 기존에 도병마사 있던 도평의사사를 장악해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국유지와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착취해 대농장을 소유했으며 농민들을 무력으로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국가 재정 역시 궁핍해 있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권문세족들이 권세도 영원할 순 없었습니다 원이 점차 세태 하기 시작한 건데요 고려는 이때를 틈타 반원 개혁 정책을 펼쳤습니다 먼저 충렬왕 때는 원 관리의 횡포를 방어하고 고려 국왕이 정동 행성의 장관을 겸직했다 총 간부를 반환 받았습니다 그리고 공민왕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는데요 중요합니다 공민왕은 먼저 기철 등 권문 세족을 숙청했다 관제를 회복해 중서 문화 성과 상서성 부활시켰습니다 또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천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했는데이 주황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공민왕 때 회복된 영토입니다 그리고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성 이문서를 폐지했고 변발 같은 몽골 풍도 금지했습니다 또 신돈의 권위로 전민 변정 도감을 설치해 권문세족들이 착취한 불법적인 대농장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 줬고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는 양민으로 풀어줬습니다 이렇게 개혁 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은 정방을 패치하고 스스로 인사권을 장악해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했기 바로 신진 사대부들 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권문세족에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시기적으로도 홍건적과 외구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다 결국 공민왕이 시되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고려의 자주성을 높이고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데요 이렇게 공민왕 때 전개에 들어온 신진 사대부는 결국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되죠 이러한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치명적인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또 신흥무인 세력도 이시기 홍건적과 외고를 격퇴하면서 성장했는데요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영과 이성계가 있습니다이 이성계가 누군지 는 다들 아시죠이 성계는 유아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정도전을 비롯한 급진파 신진사대부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었죠 이러한 조선건국 과정에서 정도전은 과전법 시행해 신진사대부의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했고요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수장 정몽주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1392년 마침내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되어 참 우여곡절이 많았던 고려가 결국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외세의 거듭된 침략 속에서도 쉽게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나라였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자 이렇게 1-4까지 마쳤고요 이제 1-5로 넘어가 [음악] [박수] [음악] 볼게요이 1-5는 고려의 사회와 사상에 대해 살펴볼 건데요 먼저 고려의 신분 구성부터 알아볼게요 고려의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눌 수 있고요 양인은 다시 지배층인 정우와 피지배 층인 양민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층인 정우는 다시 문무 양반과 중류층 나뉘는데요이 정오란 건 쉽게 말해 국가에 녹을 먹고 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무원들 있데요 이들은 국가로부터 직역의 대가로 토지인 전정을 지급받았습니다 이러한 정호 중 고위 관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바로 문무 양반이고 이중 문반 문신 무반 군대의 장군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음서와 공음전 통해 특권을 누리며 성장했고 문벌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급 걸린 중류 층에는 서리와 난반 군반 향리가 있으며 이중 향리는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습니다 이러한 향리의 우두머리를 호장이 하는데요 이들은 지방행정을 장악하고 지방군 통솔 했고요 일부 향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 관직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리고이 중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지역과 전정은 세습이 가능했습니다 다음은 일반 평민인 양인데요 이러한 양민은 9년에 거주하는 군민과 향부곡소 거주하는 향부곡소 주민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중 연민의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 이들을 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흔히 정하면 소나 돼지를 잡는 천민을 떠올리는데요 고려의 백정은 일반 농민을 뜻한다는 걸 잘 기억해 두세요 이러한 군민들은 모두 와 공물 역 등의 세금을 내야 했고요 법적으로 과거 응시도 가능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과거를 보긴 힘들었겠죠 한편 고려의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소 주민들은 같은 양민이서도 참여를 받았는데요 이들은 거주 이전에 자유가 없고요 세금도 일반 백성보다 많이 내야 있습니다 또 승려가 될 수도 없었고요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었으며 일반 연민과 결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제한이 좀 많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신분이 양민이 있다는 걸 잘 기억해 드세요 그리고 고려의 신분 중 가장 낮은 천인들은 대다수가 누이였고 이들은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와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으며 역의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노비는 크게 공 노비와 노비로 구분 수 있는데요 공 노비는 국가 소속의 노비로 다시 이병 노비와 외거 노비로 구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소유한 산 후비 역시 솔거 노비와 외거 우비로 나눌 수 있는데요 건 후비는 주인집에 같이 사는 노비고트 노비는 따로 거주하며 국가나 주인에게 신공을 내던 노비였던 엄격한 신분 사회였는데 그래도 고려의 신분제는 신라의 골품제 비하면 훨씬 개방적이었다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 백정의 경우 과거를 통해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고요 향리 역시 과거를 통해 고위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 군공을 세운 사람들은 무관에 등용되지 했고요 노비 역시 재산을 모으거나 공을 세워 양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민인요 이의민은 무신집권기 노비의 신분에서 최고 권력자가 된 독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고려의 신분 제도에 대해 살펴봤고요 이제 고려 사회의 모습으로 넘어가 볼게요 고려는 기본적으로 지역의 자율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지역민들은 모두 촌에 소속돼 있었고요 향리가 9년에 운영을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고려는 지역간 차별도 심했는데요 앞서 향부곡소 주민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았는지 소개해 드렸었죠 하지만 향부곡소 경우도 공을 세우면 일반 9년으로 승격이 가능했고요 9년이 반란 등의 문제를 일으키면 향부곡소 강등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지역간 차별이 존재했던 고려은 본 관제를 시행해 이름 앞에 출신 지역을 엄격하게 표기하게 했습니다 한편 지역민들의 공동체 조직으로는 향도가 있었는데요이 향도는 고려초 매양 활동을 하던 불교신앙 조직 출발해 마을의 행사를 주관하는 마을 공동체로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에는 농민의 생활안정을 위한 여러가지 사회 시책들이 있었는데요 흉년의 비밀을 구제해 주던 의과 물가 안정을 위한 상평창 그리고 일종의 병원인 동서대비원 빈민구제 기구인 제보가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고려는 조세 수치의 한도를 지정해 농번기에는 자을 면제시켜 주고 자연재 발생시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줬습니다 한편 고려의 가족제도를 보면 고려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고요 태어는 순서대로 호적에 기했으며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재산은 균분 상속이 있고요 딸이 부모의 제사를 모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서의 혜택 역시 사위나 외손자에게도 해당됐다 또한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또 고려는 다른 이민족의 기화를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오픈 마인드의 나라였는데 거한이 여진 발해의 주민들을 받아주고 정착할 수 있게 관직이나 토지를 주기도 했습니다 자 이렇게 고려의 사회 모습을 살펴봤고요 다음으로는 고려의 종교와 사상입니다 먼저 고려의 유교대학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었소 ju 건국 초부터 유교의 민본 사상을 중시했고 광종 때는 과거제를 실시해 유학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성종 때 최승로의 심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념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유학은 고려 중기부터 지배층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띄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후기부터는 안양이 원으로부터 수용한 성리학이 신진 사대부들의 기반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요 이중 대표적인 성리학자 있는 이재현과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있습니다 한편 고려에는 유학 교육 기관으로 중앙의 국자 감과 지방의 향교가 있는데요이는 모두 국가주도의 관악이 있고요 고려 중기부터 는 과거 합격에 대한 열망으로 사학이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전국의 유명한 12개의 사립학교를 사학 10도라고 하는데요이 중 최충의 구재학당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학이 성행하자 국가에서는 관학 진흥 책으로 국자감의 장학재단인 양영고 설치하기도 했지만 사학의 인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국자감의 명칭이 성균관으로 변경됐고 이후 조선으로 쭉 이어졌습니다 다음은 고려의 역사인데 고려초에 쓰여진 왕조 실록이나 칠대 실록 등은 현존하지 않고요 문벌이 지배층이 고려 중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입니다 중요합니다이 삼국사기는 기전체 방식으로 쓰여진 역사서로 신라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충과 효 등 유교적 합리주의를 강조해 왕권 강화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무신정변과 몽골의 침입을 겪으면서 자주 의식을 조한 역사서가 편찬되어 대표적인 역사서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한 이규보의 동명왕 편이 있고요 1년에 삼국유사 역시 중요한 역사서입니다이 삼국유사는 불교를 중심으로 쓰여졌으며 시료들의 신비한 탄생 설화를 통해 고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이 삼국유사의 당군 신화가 수록돼 있다는 점인데요 이렇게 당군을 민족의 시조로 기록한 또 다른 역사서에는 이승유 재왕 운기가 있습니다 한편 고려말의 역사서는 성리학의 정통성과 대의명분을 강조했고요 이러한 역사서로 이재현의 사약이 있습니다 다음은 고려의 불교인데이 고려가 또 명실상부 불교의 나라죠 그래서 왕실의 지원으로 고려인 많은 사찰이 건립됐고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 개최됐으며 과거 시험엔 승가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승려의 지위도 왕족이나 귀족으로 상당히 높았고요 국사와 왕사를 두어 승려에게 국가 정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의 종파인 교종과 선종구의 분열이 심각해지자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요 이에 앞장선 인물로는 대각국사 의천이 있습니다 중요합니다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해 해동 천태종을 창시했으며 선종 통합과 교리와 직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 겸수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고려 전기에 의천이 있다면 고려 후기에는 진율이 있는데요 무신 직관기 활동했던 보조국사 진울 역시 중요합니다 진율은 선종 중심의 교종 통합을 주장했고 정애 결사를 조직해 참선 수행과 교리를 모두 중시했습니다 또 수선사를 중심으로 불교 개혁 운동을 펼쳤고 정의 쌍수와 도노 점수를 강조했습니다이 의천과 진율이 비교해서 문제에 잘 나오니까요 잘 정리해 두셔야 됩니다 그리고 100년 결사를 조직한 요새는 극락 왕생을 기원하고 참회와 염불 수행을 강조했고요 회심은 유교와 불교는 일치한다는 유불 일치설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무신 직관기 이어진 불교의 개혁운동은 원 간섭기에 들어서며 약화됐고 권문세족들이 의해 점차 세속화되고 폐단도 극심해졌다 권문세족들이 의해 화려한 불화가 유행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수월관음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원 간섭 기에는 새로운 종교로 선종의 종파인 임재 종에 수용됐던 승녀 로는 보우와 해은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가 발달했던 고려에서는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대장경이 조판된 이러한 대장경 1는 초조 대장경과 팔만 대장경이 있습니다 중요합니다이 초조 대장경은 안타깝게 소실됐고 팔만대장경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돼 있습니다 이밖에도 불교와 관련된 예술품으로 고려 전기에는 불상이 고려 후기에는 불화가 제작됐고 안동 봉정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 수전 등 불교 사원도 건축됐다 8각 구중 석탑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고려의 유교와 불교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다음으로는 고려의 토착 신앙과 독교 풍수지리설에 대해 간단히 알아볼게요 고려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 성왕과 고려의 시조인 태조 왕권을 신격화해 토착 신앙을 형성시켰다 토속 신에게 드리는 제사 등과 결합시켜 거 했 그리고 독교 역시 왕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근간이 이어졌고요 마지막으로 풍수지리설은 고려 건국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남경 길지설 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수지리설은 또 고려말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영향을 미쳤는데요 과연 고려 이후 등장하는 조선은 또 어떤 모습일지 1-6 만나볼게요 [음악] 자 드디어 조선입니다이 1-6 그래는 조선 전기의 이야기를 좀 해볼 건데요 먼저 조선의 건국부터 시작해 볼게요이 조선의 건국 과정은 앞서도 소개해 드렸었죠 고려말 위아도레미 는 대표적인 급진파 신진사대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재상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꿈꿨지만 결국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고요 이방원이 왕자이 난을 통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조선의 3대 왕인 태종 있니다 중요합니다이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위해 손에 많은 피를 묻힌 왕인데 먼저 공신과 왕족의 사병을 파했다 파악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종 이후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이 등장했는데요 완전 중요합니다 세종은 이상적인 유교 정치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시한 왕이었고 그래서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 유교 경전에 대해 토론하는 경연을 활성화시켰다 의정부 서사제 도입했습니다 또 집현전을 설치해 다양한 분야의 편찬 사업을 주도했는데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음입니다 또 세종은 백성들에게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충신과 효자의 이야기 등을 수록한 삼강행실도 편찬 했고요이는 한글로도 번역됐습니다 이밖에도 세종의 시대는 민족문화의 꽃이 피고 과학이 발전하는 조선의 최 전성기였죠이 뒤를 이은 건 문종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종은 안타깝게도 병으로 일찍 사망했고 어린나이의 왕위에 오른 문종의 아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겼습니다 이 수양대군이 바로 세조대 계유정난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세조는 왕건 강화를 위해 육조직계제 다시 도입하고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왕이 된 성종은 세조가 폐지시킨 집현전을 계승해 홍문관을 설치했고요 경연을 부활시켰으며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했습니다이 경국대전은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고요 6조에 맞춰 전으로 구성되 있습니다 또 성종은 이밖에도 오일를 간행해 유교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는데요 이로서 성종때 조선의 유교적 법치 국가의 토대가 마련됐습니다 자 이렇게 조선 정기 나라를 안정시킨 왕들에 대해 만나 봤으니 이제 조선의 통치 체대로 넘어가 볼까요 조선의 중앙정치 제도는 의정 무 6조 체제입니다 이중 국정 총괄 기구인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했으며 그 아래의 6조에서는 부서별로 행정 실무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뒷받침하는기구 구로는 왕의 비서 기간인 승정원 반역 재인을 다루는 왕의 직속 사법 기구인 의금부 있었습니다 반대로 왕권을 견제하는 기구로 원부 사관원 홍문관이 있었는데요이를 통칭해서 사라고 부릅니다 중요합니다 이거 고려의 사와 헷갈리시면 안 되겠죠 조선의 3사는 고려와 다르게 언론 역할을 하는 기구고장 감찰하는 사업부와 왕에게 간언을 하는 사간원 그리고 왕의 자문 기관으로 경연을 담당한 홍문관 구성되 있습니다 이밖에도 수도의 행정과 치환을 담당하던 한성부 역사서를 편찬한 춘추관 그리고 국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도서관 체제 안에서 조선은 국왕과 신하들 간의 합의를 통한 유교 정치를 이어나갔습니다 특히 언론 기간인 삼사는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것으로이를 통해 사족의 여론 또한 수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조선의 지방통치 체제인데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부 모군 현을 두었으며 기존의 향부곡소 폐지하고 모든 부목 구연의 수령을 파견했습니다 확실히 고려보다 중앙에 통제력이 강화됐는데요 이때 파견된 수령은 행정권과 사법권 군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향리는 고려 때보다 지위가 낮아져 수령의 보좌와 행정 실무만 담당했고 지방 양반들의 자치 기구인 유양은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고 한편으론 수련과 향리의 부정부패를 감시했다는 모두 군역의 의무가 있어 전군으로 군대에 가거나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전군의 비용을 부담했을 부담하고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을 보인이 합니다 이러한 조선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눌 수 있고요 중앙군은 위로 궁궐과 수도를 보호했으며 지방군은 국방 요충지인 영과 진을 수비했다 조선의 관리등용 제도인데요이 중 가장 대표 적인 과거제는 문과와 무과 자가로 구성되 있고요 문과는 다시 소가와 대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때 소과에 합격한 생활이나 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고요 이후 대과를 봐서 합격을 해야 문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과거에는 승과 대신 무과가 있었고요 기술관을 뽑는 잡과는 해당 관청에서 실시했습니다 또 조선에도 음소가 있긴 했지만 고려와 다르게 음서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어 의미는 도는 아니었습니다 한편 조선의 관리 등용에 상피제 아는 원칙이 있었는데요이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인척이 같은 관서에 근무하는 것을 금지하고 출신 지로는 지방관을 보내지 않는 제도였습니다 다음은 교육 제도인데요 조선은 중앙교육 기관으로 고등 교육을 담당한 성균관과 중등 교육을 담당한 사부 학당을 두었고요 지방엔 향교와 서원 서당 등을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통통신 제도로는 봉수제 역참제 있고요 조세를 한성으로 운송하기 위해 좋은재가 운영됐다는 것도 잘 기억해 두세요 자 그럼 이제 다음으로 조선의 대회 관계에 대해 살펴볼까요 조선 정기의 대외관계는 사대 교인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요 대란 큰 나라를 섬긴다는 의미로 조선은 명에게 사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대는 처음부터 이루어진 건 아니었고요 건국 초에는 태조가 추진한 요동 정벌로 명과 갈등이 있었지만 태종 때부터 관계가 회복되며 본격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조공을 바치는 대신 답례품을 하사 받았고요 왕이 교체될 때마다 명예 책봉을 받아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이를 통해 조선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쉽게 받아들이고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겠죠 한편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히 활용한 교린 정책은 여진과 일본 두 나라에 적용했는데요 먼저 여진에 대한 강경 책으로는 세종때 사군육진 개척이 있고요 군은 최윤덕이 진은 김종서가 개척했습니다 이러한 사군육진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지금의 국경선이 완성됐고 토관 제도를 실시해 귀야 여진족에게 관직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회유 책으로는 무역소 설치해 제한적으로 조선과의 교류를 허용해 줬습니다 한편 일본과의 교린 정책에서는 강경책으로 세종때 이종무의 쓰시마섬 정벌이 있고요 회유 책으로는 부산포 제포 연의 산포를 개해 제한적 교역을 허용했습니다 이밖에도 조선은 지금의 태국인 시합과 자와 등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은 물론 지금의 오키나와인 뉴큐 아도 교류했습니다 자 이렇게 조선 정기의 외교 관계까지 살펴봤고요 다음으로 15세기 이후 성장한 사림과 공론 정치에 대해 알아볼게요 살림이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회들을 말하고요 이들은 왕도 정치와 향촌 자치를 추구했으며 성종 때부터 언론 기간인 3사의 진출에 기존의 훈구 세력을 비판했습니다 흥구 란 세조의지기 과정에서 공을 세워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싫었겠지 결국 사림이 화를 입는네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는데요이 중 첫 번째 사인 무호 사화는 연산군 때 김종직의 조의 재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고요 갑자 사와 역시 연산군 때 연산군의 친모인 페비 씨의 죽음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훈구 살림이고 할 거 없이 많은 선비들이 죽어 나갔고요 복수심으로 미쳐버린 왕 연사는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이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 중종이 등용한 조광조는 현량과 실시와 소격서 폐지 위운 삭제 등의 개혁 정치를 펼쳤는데요 이러한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훈구의 반발을 샀고 중족 역시 강도 높은 왕도 정치를 주장하는 조광조에게 등을 돌려 결국 김묘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명종때 외척 관의 권력 다툼으로 마지막 사과인 을사 사화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네 차례의 사과에도 사림은 끝내 정권을 장악했는데 이러한 사림들의 원동력은 바로 서원과 향입니다 이중 서원은 지방 사림들이 세운 교육 기간이었고 향약은 향촌의 자치 기약으로 사림들은이를 통해 향촌 사회에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조 때 사림은 전개를 장악했는데 하지만 한정된 관직에 비해 사림의 수는 너무 많았고 이에 붕당이 형성됐습니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닌 건데요이는 을사사화 이후의 신 청산 문제와 이조전랑 원인이었습니다 이 이조 전랑의 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관직이 있고요이를 두고 붕당은 김묘 원파 심의 연파 나뉘었습니다이 김묘원 바로 동인이 심의파 서인인 동인은 강경파 서인은 온건파 볼 수 있습니다 또 학문적인 부분에서도 차이를 보였는데요 동이는 이완과 조식의 학문을 서이는 이와 성운의 학문을 계승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조선의 붕당은 서로를 상호 비판하고 견제하며 공론을 형성해 나갔고요 사의 관리들은 물론 제하 사림들의 의견까지 수용하며 비교적 건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붕당 정치는 조선 후기부터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는데요 과연 조선 후기에는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을지 1-7회 만나 [음악] [박수] [음악] 볼게요이 1-7 그래는 조선 후기에 대해 알아볼 건데요 여러분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핵심 사건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1592년에 일어난 임진 회란 있니다 중요합니다 임진 하라는 일본의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데요 씨가 대륙 침략에 야욕을 품고 조선을 침략하며 일어난 전쟁이었는데 당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던 조선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침입에 20일 만에 한성을 뺏겼고 선조는 부랴부랴 의주로 피난을 가며 명의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거침없는 외군 공격에 평양성 마저 락 조선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요 이때 다행히 이순신이 이끄는 수근의 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옥포 회전을 시작으로 한산도 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 씨는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육지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활약했습니다 또 명군의 참전으로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했고요 김시민의 진주 대첩과 권율의 행주 대에서도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반격에 일본과 명은 3년간의 긴 휴전협정에 지만 간 휴전협상을 깬 일본이 정유년에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때 역시 이순신이 명양 대첩에서 활약하며 대승을 뒀고요 때마침 도요토미데요 시가 사하며 사기가 꺾인 일본군의 철수로 7년간의 전쟁이 종결됐습니다 이러한 임진 내라는 동아시아 정세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는데요 먼저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임명 피해를 입었으며 많은 문화재가 됐습니다 이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고 지원군을 보내 준 명에 대해서는 숭상 의식이 높아졌습니다 일본의 경우 전쟁의 패배로 정권이 교체되어 에도막부가 들어섰고 조선에서 잡아간 기술자와 학자 등에 의해 인쇄술과 도자기 제조 기술 성리학 등이 발달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정세 역시 바뀌는데요 조선에 무리한 원군을 지원했던 명은 국력이 약해졌고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한편 일본의 에도막부는 조선의 국교 재개를 요청했고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 싶 던 조선은 부산에 외관을 설치하고 일본의 통신사를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외란 이후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전쟁후 복구 사업에 힘써 토지 대장과 호적을 정비했고 토지를 개관하고 부서진 성각 수리했으며 민생 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습니다 또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배교를 펼쳤는데요 후금이 명을 공격했을 때 명이 조선의 지원군을 요청하자 명과의 의리상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강홍립게 적당히 후금에 항복하라 명령해 강홍립 투항 사건이 일어났고요이는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때마침 광해군은 자신의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저질렀고이를 구실로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광해군은 왕위에서 폐의 했습니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인들이 함께 명과는 친하고 금을 배척한다는 친명 배금 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결국 정묘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정묘 오란은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사건인데요 이때 의병장 정봉수 활약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후금은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이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급기야 조선의 군신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청과의 화의를 두고 주전론과 주화론 대립이 일어났는데요 주전론이란 김상원 등이 주장한 것으로 청과의 화해를 반대하고 청에 맞서 싸우자는 입장이었고요이를 척화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주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천과 화해를 맺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최명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전론과 주화론 대립에서 결국 주전론이 우세에 조선은 청의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청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이것이 바로 1636년에 일어난 병자 오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청에게 참패를 당했는데요 당시 왕이었던 인조와 대신들은 청을 피해 모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통해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습니다이 정묘호란 터 병자 호환까지 이어지는 호란의 전개 과정과 결과도 중요하니까요 잘 기억해 두셔야 됩니다 이렇게 외란 호란이 아는 두 차례의 전쟁은 조선에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는데 우선 먼저 조선의 대회 인식이 변화했습니다 사실 기존의 조선은 화이론적 세계관과 소중화 주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이론적 세계관이란 명은 문명 국가로 주변 국가는 오랑캐로 보는 관점이고 소중화주의 있는 우리가 작은 중국이 라는 뜻으로 조선이 가지고 있던 나름의 자부심이었다 조선 중화주의 대두 됐고요 이러한 조선 중화주의 있는 효종때 북벌론 이어졌습니다 북벌론은 청을 정복하자 주장으로 송시열과 이완 등이 중심이 되어 추진됐지만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패했고 이후 청에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이는 조선이 청 낸 여행사의 활동을 기반으로 시작됐고요 이들은 청을 통한 선지 문물의 수용을 주장했습니다 한편 숙종 때는 만주일보 조선인들도 청과 조선 사이에 국경 문제가 발생했는데요 이때 백두산 전개를 세워 청과 조선 사이의 국경선을 확정했습니다 근데 이게 19세기 후반에 다시 이슈가 되면서 간도 문제로 이어지는데요 그 부분은 나중에 다시 만나보기로 하고요 우리는 양란 이후의 정치 변화로 넘어가 볼게요 먼저 통치 체제의 개편입니다 조선 후기의 중앙 정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건 바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됐다는 겁니다 비변사는 원래 국방 문제를 다루던 임시 기구였다 겪으며 비변사가 국정 총괄 기구로 자리잡자 이에 의정부와 육조의 기능은 약화됐습니다 그리고 군사 제도에서는 중앙군이 오군영 체제로 개편되어 직업군이 훈련 도감과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형까지 다섯 개의 군이 신설됐고 지방군은 예비군 성격을 띄고 있는 소고로 양반 천 까지 모두 포함됐습니다 또한 수치 제도에서도 변화가 생겼는데요 토지 세인 전세는 풍흉에 상관없이 토지 1결당 사두를내는 영정법 변화 있고요 집집마다 특산물을 내던 공납이 방납의 폐단으로 변질되지 특산물 대신 토지 1결당 12도를 내기한 대동법을 실시했습니다 중요합니다이 대동법은 광해군이 처음 시행했고 농민의 조세부담을 낮춰주는 좋은 제도였지만 지주들의 반대가 심해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무려 100년이 걸렸습니다 이러한대 법은 조선 후기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에도 기여했는데요이는 공납의 폐지로 왕실의 필요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구역에서는 균역법을 실시해 전군의 비용을 1년에 두 필에서 한 필로 감면해 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금 감면으로 줄어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결작 선무군관포 징수해 지주들에게 토지 일결 이두식 추가로 걷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 공간이란 칭호를 주 매년 한필의 군포를 자 이렇게 수치 제도까지 변화된 조선의 통치 체제에 대해 살펴봤고요 다음으로 정치의 변화를 알아볼게요 조선 중기 붕당이 출연하며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고요 이중 북인이 광해군 때 전개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인조반정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요 인조 때부터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서인이 주도권을 잡아 남인과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현종때 일어났던 두 차례의 예 논쟁으로 당간의 대립이 치열해졌기 효종과 효비가 죽었을 때 왕실의 어른인 자이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예법 논쟁이었다 결국 왕실의 특별대우를 주장한 남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처럼 예송로 붕당 정치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고 이러한 갈등은 숙종 때 황국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황국은 총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요 경신 왕국에서는 서인이 기사 왕국에서는 남인이 그리고 갑술 왕국에서 는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고이 과정에서 분당 정치는 일당 전제화 되고 심각한 당파싸움으로 변질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황국 결국 남인은 몰락했고 서인은 남인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황국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제기합니다 men 큰 효과는 없었고요 이후 노론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지휘했습니다이 영조는 정조와 함께 조선후기의 태평성대를 이끈 왕인데 중요하니까 잘 정리해 두세요 영조는 먼저 국왕이 중심이 되는 강력한 탕평책을 실시해 붕당 정치를 뿌리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하 사림의 공론을 인정하지 않았고요 서원을 대폭 정리했으며 이조 전랑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고 성균 관에는 탕평비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붕당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죠 한편 영조는 이밖에도 많은 업적을 가지고 있는데요 앞서 소개해드렸던 균역법 영조가 실시한 제도였고 영조는이 통해 민생을 안정시켰습니다 거기에 가혹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신문고를 부활시켰고 법전인 속대전 백과사전인 동국문헌 비고를 편찬했습니다 그리고 영조 이후 왕위에 오른 정조 역시 영조의 정책을 계승해 붕당의 관계 없이 능력 중심의 인재를 등용한 탕평책을 실시했고 규장각을 설치해 초문 신재를 통한 젊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또한 왕의 친니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었으며 개혁 도시인 수원화 성도 건립했습니다 또 시전상인 인들의 특권인 금란 정권을 폐지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고 서울에 대한 차별도 개선했으며 법전인 대전통편 편찬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조가 1800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19세기의 조선은 암흑기에 접어드는데요 정조의 사후 순조가 어린나이의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외척인 일부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며 세도 정치가 시작됐고요이는 순조와 헌종 철종까지 약 60년간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세도 정치기 안동김 씨와 풍양조씨 등 세도 가문의 횡포로 왕권은 약해지고 정치 기간은 문란해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했던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지방 관리들의 농민 수탈은 더욱 극심해졌다 피폐해졌다이 시기에 조선의 백성들의 삶은 어땠을지 1-8 만나 [음악] [박수] [음악] 볼게요 자 드디어 1 단원의 마지막 단원인 1-8 있니다 이 단원에서는 조선의 신분제도와 조선 후기의 변화된 경제와 사회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게요 먼저 조선의 신분 제도입니다 조선 정기의 신분제는 법제상는 양천제 있는데요 양천제 신분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 걸 말합니다 이중 양인은 자유민으로 조세와 구역을 담당했으며 과거 응시가 가능한 집단이었고 천이는 부 자유민으로 청역을 담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노비 같은 천민이 천인 천인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양인이게 양천제요 사실 이건 그저 형식적인 신분제 그요 실상은 양방과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 반상제 조선의 신분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중 양반은 지배층으로 국가로부터 과전 녹봉을 지급받아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했고 구역의 의무가 없는 특권 층이었다 관리와 역관 의원 등이 있고요 이들의 지역은 세습이 가능했습니다 또 서울 역시 중인이 있는데요이 서들이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어머니가 평민이나 천민인 사람들이고요 양반에 비해 차별을 받아 과거의 문과 응시가 불가능했습니다 다음은 일반 평민인 상민 있데요 농민과 수공업자 상인들이 이에 해당되겠죠 이들은 모두 조세와 공납 역의 의무를 가지고 있고요 법제상 과거 응시가 가능했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이 상민 중 수분이나 역졸 등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실량 역전으로 구분 있는데요이는 신부는 양인이 역할은 민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천민은 대부분이 노비였던 매매와 증여 상속이 가능했습니다 또 부모 중 한쪽만 노비어 자녀 역시 노비였다 외에도 백정이 광대 무당 등도 천민이었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확실한 신분제 사회였고 지배층인 양반들이 유양수 서원 향약 등을 통해 향초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신분 질서는 조선 후기부터 크게 변화 있는데요 이는 조선후기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경제 발전은 농업에서의 모내기법의 발달로 시작되는데요 모내 기법은 기존의 직파법 비해 노동력을 크게 감소시키고 수확량은 다섯 배 이상 증가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에 농지를 확대하는 광장이 유행하면서 일부 농민들은 분홍이 됐고요 노동력의 감소로 다수의 농민들은 소장 농이나 임 노동자로 전락했습니다 또 조선 후기부터는 담배와 인삼 면화 등의 품 작물의 재배가 보다 활발해졌고 지대를내는 방법도 타조법 도조법 변화했습니다 도조법이란 소작농이 지주에게 내던 지대를 비율이 아닌 일정액으로내는 걸 말하고요이를 통해 소작농들의 부담이 줄어들었습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수공업에 변화가 생겨 기존의 관영 수공업 대신 민형 수공업이 발달했고 이러한 민형 수공업은 처음엔 상인이 주문한만큼만 상품을 제작한 선대제 형태를 띄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독자적으로 상품 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독립 수공업자 그이 늘어났고 공장제 수공업이 확산됐습니다 또 광업소 발달해 민간 광산의 채굴과 은광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요 이에 돈 많은 상인들에게 투자를 받아 광산을 경영하는 덕대가 등장했습니다뿐만 아니라 이시기 대동법의 시행으로 등장한 공인의 활발한 활동으로 조선후기 상품 화폐 경제가 크게 발달했습니다 거기에 정조가 금란 정권을 폐지한 통공 정책으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지며 사상이 출전했고 이러한 사상에는 한강의 경강상인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동네의 내상이 유명합니다 특히이 개성의 송상은 인삼을 재배하고 유통하며 성장했고 또 일부 사상들은 도고로 성장했는데요 도고란 상품을 매점매석에 상품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매매 조작을 했던 상인들을 말합니다 한편 상업의 발달로 장시 역시 확대돼 보부상이 활발히 활동했고 배를 이용해서 상업 활동을 하는 선상로드 여도 함께 성장했습니다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발한 상업 활동으로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했고요 이때 전국적으로 사용된 화폐는 상평 통보였습니다 이렇게 화폐가 사용되자 조세와 소작료를 화폐로 내기 시작했고요 일부 지주나 상인들이 화폐를 축적하면서 유통 화폐가 부족한 전왕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이시기 국제 무역도 발달했는데 이러한 국제 무역에 청과의 대청 무역과 일본과의 대일 무역이 있고요 대청 무역에서 만상이 대일 무역에서 내상이 활약했습니다 이렇게 조선후기 모내기법의 발달을 시작으로 경제가 발전했고이는 조선의 신분질서를 흔들었습니다 특히 상민의 분홍이 납속 책과 공명첩을 통해 돈을 주고 양반이 됐고요 양반이 되기 위해 족보를 매입하거나 위조하기 했습니다 이렇게 돈만이 쓰면 양반이 될 수 있게 되자 양반의 수가 증가했고요 대다수가 노비인 천민들 역시 도망이나 납속 군공 등으로 신분이 상승돼 노비 수가 감소했습니다 거기에 노비 종법과 공노비 해방으로 노비 수는 더욱 감소했는데요 순조 때 공노비 해방한 건 군역의 대상자인 상민의 수를 늘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지배층인 양반들의 경우 향반 잔반 등 몰락 양반이 증가하며 양반의 권위가 땅으로 떨어졌고요 향촌 사회에서는 기존 향반 있 구양가 새롭게 양반이 된 신양이 부딪히는 향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향전 수령은 돈 많은 신앙과 결탁했다 약화되고 수련과 향리의 권한은 강화됐습니다 한편 중인들 역시 신분 상승 운동을 펼쳤는데요 이중 서들이 신분 상승 요구는 일부 받아들여졌지만 기술적 중인들의 신분 차별 반대 운동은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조선후기 신분 질서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 아시겠죠 조선후기의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는데요 학문에서는 새로운 항문인 시락이 발달했습니다 시락은 실용적인 항문으로 크게 농업 중심과 상공업 중심의 시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중 농업 중심의 실학자들은 농촌사회의 안정 과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했고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형원과 이익 정약용이 있습니다 이중 유형원은 신분에 따른 토지 재분배 있 균전론 주장했고 이익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인 영업전 뺀 나머지 토지를 매매할 수 있게 한 한전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은 여전 론을 주장했는데요이는 마을단위로 토지를 공동 경작해 한양에 따라 분배하는 주장이었습니다 한편 상공업 중심의 실학자들은 청의 선진문물 수용 과 상공업 지능을 주장했고 이들을 북학파 아고 부르는데요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중 유수원 산원 공상의 직업적 평등을 강조했고요 홍대용은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과 문벌제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또 박지원은 수레와 선박의 사용과 함께 화폐 요통과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요 마지막으로 박제가는 박지원과 마찬가지로 수레와 선박 사용을 강조하고 소비의 촉진을 주장했습니다 한편 조선후기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예언 사상이 유행했는데 정씨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정감록 was 도참설 미륵 신앙이 대표적입니다 또 17세기 서양 학문으로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가 18세기 후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의 의해 신앙으로 수용되면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이러한 서학을 인간 평등과 사랑 바게 등을 강조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유교적 제사 의식을 거부해 조선정 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세의 구원을 약속한 천주교의 교세는 점차 확산됐습니다 한편 서하인 천주교에 맞서 새로운 종교인 동학도 등장했는데요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유교와 불교 도교 민간 신앙을 융합한 종교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내세웠습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 사상과 후천개벽을 주장해 농민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역시나 이러한 동학을 사교로 규정해 포교를 금지하고 교조 최제우를 처형했고 최제우의 뒤를 이은 이대 교주 최시형이 동경 대전과 용담 유사 등을 편찬해 교단을 정비하며 동학은 농촌 사회에 더욱 확산됐습니다 한편 세도정치시기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지면 지배층의 수탈이 그게 달했고 자연 재회와 전염병까지 겹쳐 농민들의 삶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워지자 농민들은 벽서를 붙이고 투서를 하는 등 지배층의 대항해 소극적인 저항을 펼쳤습니다 그리고이는 이후 집단 시위나 항조 거세 등의 적극적인 저항 형태로 변화 있고요 19세기에 농민 봉 기록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농민 공기에는 먼저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있는데요 평안도의 몰락 양반인 홍경래의 주도로 일어난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과 지배층의 수탈의 대항에 일어났고요 기세를 높여 청천강 1 때까지 점령했지만 결국 관군에게 진압되었지만 홍경래의 나는 19세기 일어난 최초의 농민 봉기로 이후 일어나는 많은 농민 봉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세기의 대표적인 농민 봉기로 1862년에 일어난 임술농민 본기가 있는데요 이러한 임술농민 봉기의 시발점은 바로 진주 농민 공기였지만 봉기는 유계춘 주도로 일어났고요 농민들이 진주선지 점령하자 중앙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맹호사 넥사 파견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파견된 안내사가 바로 박규수 있는데요이 박규수는 이후 개항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잘 기억해 두세요 아튼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 조건을 일부 들어주고 삼정 이정청 설치 등 여러 가지 시책을 제시합니다 큰 효과는 없었고요 문제를 일으킨 탐가 놀리뿐 아니라 농민 본기의 주도자들은 역시나 농민들의 이러한 저항에도 조선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이러한 농민 본기는 삼정의 문란과 탐가 놀이들을 횡포에 맞서 사회를 바꾸고자 한 우리 민중들의 적극적인 저항 운동이었다는 걸 잘 기억해 두세요 자 이렇게 1-8까지 1단원 전체를 한번 정리해 봤는데요 오늘 준비한 내용 여기까지입니다 아무래도 1단원 전체를 한 번에 정리하려니 내용이 상당히 많았죠 그래도이 영상 반복 시청하시면서 교과서를 함께 정리하신 한국사 문제없이 1등급 나올 테니까요 조금만 힘내 봅시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고요 구독과 좋아요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그럼 안녕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