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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철기 문화와 역사 탐구

5대 역사에 등장했던 미지의 왕국, 대일에 쌓인 나라 가이아나. 최근 들어 그들이 남긴 흔적들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통해 가야의 실체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부와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그런 상징이 되겠죠.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찬란한 철기 문화의 살아있는 증거 철정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 왕국이 철의 왕국이었다고 하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죠 궁극의 제철기술과 폭넓은 철기 문화를 통해 탄생한 철정 현대 과학의 눈으로 추적해본 철정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철정을 통해 드러나는 철의 왕국 가야의 진명 지금부터 가야의 새로운 역사가 열립니다 한반도 남단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는 6개의 연맹치로 존재했던 육가야 중 100권을 차지하고 있던 금간 가야의 도읍지였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건국설어각에 뜬 구지봉 부근, 가야의 시조 수로왕릉이 인접해 있는 지점에서 살아있는 가야 역사의 기록, 대성동 고분을 만날 수 있다. 2세기부터 5세기까지. 금강가야 지배층의 무덤지역으로 사용된 대성동고구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4세기 전후 한국 고대사의 빈칸을 채워주는 귀한 통로이며 현재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이다. 제가 쓰이는 이곳은 대성동 고분군 중에서 88호분이라고 이름을 지은 무덤이 되겠습니다. 대형화의 나무 덧넬 무덤이 되겠고요. 이곳은 보시다시피 한 80% 정도가 도굴로 인해서 파괴가 되었습니다. 2012년 여름, 발굴 조사를 통해 세상에 나온 88호분과 91호분. 이 두 개의 고분에서는 북방민족과 해양민족의 습성을 두루 갖춘 다양한 국적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다. 더불어 한반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장풍습도 발견되었다.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이 사망했을 때 그를 따르던 무리를 함께 묻는 순장풍습은 북방 기마민족의 전형적인 매장 형식으로 가야와 고대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88호봉 같은 경우에는 밑에 쪽에 두 명을 나란히 이렇게 눕히고 그 다음에 그 위에 다시 흙을 깔고 위에 다시 한 명을 순장을 하는 그런 것들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확인이 됐기 때문에 앞으로 가야시대 순장 제도에 대해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성동 고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물이 바로 철기로 만든 유물이다. 무덤에 묻히는 부장품들은 무덤의 주인공이 생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물건들로 채워지는데 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성동 고분에서 가장 흔하게 출토되는 유물이 바로 철기 유물들이다. 가야를 전설 속의 철의 왕국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많은 철기 유물 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덩이쇠, 일명 철정이다. 이것을 만약에 절반을 이렇게 잘랐다고 생각해 보시면 절반 자르고 이 부분을 단절해서 두드렸다고 치면 뭐가 되겠습니까? 도끼가 되겠죠. 반대로 말하면 또 이 부분을 치고 이 부분을 구부린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꺽쇠가 되겠죠. 이런 식으로 철기의 소재가 되는 겁니다. 철기의 중간 소재인 철정은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철 소재로서 가야시대 철기 문화의 상징이다. 대성동 고분에서 출소된 철정의 양을 보면 신분이 높은 왕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일수록 더 많은 수량의 철정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대 가야에서 철정이 지닌 패권과 철기 문화를 숭상하는 가야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가야가 남긴 수많은 유물들은 그들이 꽃피운 화려한 철기 문화의 성과물이다. 가야 지배자의 무덤에서는 화려한 금동 제품보다 녹슨 철기 유물들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제철 강국이었던 고대 국가들 속에서 가야는 한반도를 넘어 주변국까지 기술력을 수출하며 가장 번성한 철기 문화를 자랑하던 나라였다. 다양한 철제품이 무덤에서나 생산유구에서 철토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비교해보면 상국이 비등한 제철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제철 기술 중에 가야가 무역을 활발하게 하다 보니까 일본과 대외 교류를 활발하게 되고 이런 일본의 가야인의 제철 기술들이 전파가 됐고 중국에서 바라본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 삼국지 위지 동의전에 가야가 철을 수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가야는 한, 예, 외, 낭랑대방이 이르기까지 철을 수출했고, 철이 돈처럼 사용된다는 것을 볼 때 철정 형태로 수출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때 한이라고 하는 건 세계 최고의 철의 대제국입니다. 그런데 그 철의 대제국이 설치한 그 9년에 철을 수출하고 있을 정도니까 이 당시에 적어도 3세기 후반 당시에 이 가야지역이, 철의 생산능력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죠. 3세기 단계까지 경주와 즉 신라의 경주와 가락국의 김의 철기의 유물들을 가지고 비교를 해보면 질과 양에 있어서 김의 지역의 우월함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철을 수출했던 가야인은 철을 다루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그 궁극의 기술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야의 철가벗이다. 철가벗은 당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금광가야를 비롯해 주변에 아라가야, 소가야, 그리고 후대의 대가야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발견되고 있다. 우수한 품질의 풍부한 자원과 철정을 통해 드러난 고도의 기술력을 통해 강력한 철과 보수로 중무장한 철기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가야. 현대 과학의 눈으로 새롭게 조명해본 가야는 삼국에도 속하지 못한 약소국 가야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실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가야의 철기군단이 착용했던 철갑옷의 과학상은 정복전쟁의 주체로 활약했던 거칠고 강인한 기상의 가야민족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가야 철갑옷의 특징은 무엇일까? 대성동 2호 갑옷의 특징은 여기 보시면 뒤쪽 부분에 있는 새 모양을 형상화한 장식이 붙어있다는 것이 특징이고요. 앞에 보시면 이렇게 고사리 문양과 같은 장식을 하고 있고 장식성이 가미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요. 대성동 2호 갑옷은 가야를 대표하는 철갑옷으로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서 만들었다고 하여 종장판갑이라 불리는 갑옷이다. 종장판갑은 한반도에서도 가야와 신라에서만 발견이 되는데 대성동 2호 갑옷은 5세기 초 종장판갑 시대의 말미에 존재했던 철갑옷으로 화려한 문양에 세련된 장식성이 특징이다. 단조기술이 좀 발달을 해야 보시다시피 허리 부분 같은 망고 찌는 부분, 착장자, 갑옷을 입는 사람이 입었을 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이렇게 자연스러운 형태로 재단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아주 중요한 기술 중 하나고요. 그리고 철판을 연결하는데 못을 이용해서 이렇게 연결을 했습니다. 대량 생산 등을 위해서 못을 이용하는 기술이 좀 발전적인 기술이고 김해시 양동리에서 출연한 출투된 철갑옷은 이처럼 못을 이용한 기술로 제작되었다. 철갑옷의 복원작업을 거친 결과 철갑옷 곳곳에서 모양이 비틀리지 않도록 구멍에 못을 끼워 절판에 조각조각을 연결한 이음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못으로 결합시켰다 하여 정결이라 부르는 이 기법은 오늘날의 리베팅과 유사하다. 철판과 철판을 맞춰 구멍을 뚫고 못을 집어넣은 다음 양쪽에서 두드리며 압착시켜 연결하는 방식이다. 가야에서는 군사를 위한 철거부뿐만 아니라 말의 몸체를 보호하기 위한 마갑과 머리에 씌우는 마주까지도 발견되어 당시 가야가 보유했던 철기 군단의 강력한 세를 짐작하게 한다. 철의 바다라 불렸던 김해를 중심으로 한 뛰어난 제철기술. 과연 그 토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무척산이라고 하는 곳 아래쪽에 생철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날생자 쇠 철자입니다. 쇠가 나는 마을입니다. 장척 묵방 이건 고려시대의 용어로 보면 누구나 다 아 이거는 수공업 집단이 거주했던 곳이구나 그런 걸 알 수 있는데 장척 강척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슬래그, 쇳동이죠. 제철을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슬래그가 무덤의 마운드처럼 쌓여 있었던 그런 기록들이 지금 있습니다. 옛 가야터에는 지금도 철의 왕국이었던 찬란한 역사를 말해주는 다양한 지명들이 존재한다. 특히 곳곳에 남아있는 철의 생산과 관련된 지명들을 통해 철을 뽑고 가공하는 작업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철의 생산 및 가공 기술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부한 원료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철의 왕국 가야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옛 가야 지역의 대표적인 광산을 찾았다 실제로 남한 지역 철광산의 대부분은 옛 가야와 신라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중 김해부근의 대표적인 광산들은 1900년대 중반까지도 최강을 했던 곳이 많다. 이곳 물금광산은 김해에 인접한 한반도 동남부의 대표적인 광산으로 자석에 잘 붙는 자철광이 나기로 유명하다. 9개 갱도를 모두 합하면 약 18km 정도의 지하 갱도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물금광사는 현재 폐광한 상태다. 이게 마이너스 1레벨인데 마이너스 2, 3, 4, 5, 6, 7, 8, 9까지 내려갔었으니까 여기서부터 한 350m 정도 합으로 내려가서 최소 채광을 했던 것이죠. 물금광산의 철광석의 질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실제 채광작업이 이뤄졌던 갱도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뜨거운 채광의 열기로 가득 찼을 이곳은 현대의 기술로 뚫어놓은 갱도다. 한때 우리나라 최대의 철광산으로 이름 날렸던 물금광산은 마그마에서 기원한 뜨거운 물의 작용으로 형성된 광물의 집합체며, 이 지역에서 나는 통질 좋은 철광석이 가야 철기문의 토대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얀색으로 이렇게. 하얀색이 철광석이라고 보면 되나요? 선이 이렇게 쭉 이렇게 선이 이렇게 돼 있죠. 아주 이런 선이 있고 여기서 여기서부터 다시 이렇게 들어가서 여기까지가 철광석 맥이라고 보면 됩니다. 1961년도에 철광석을 캤던 갱도지역입니다. 한 30여년 동안에 한 100만 톤 이상을 캐는 것 같습니다. 현재 제철업체들이 원료로 납품받는 철광석은 철 함유량이 60% 이상이어야만 가능하다. 이곳의 철광석은 어떨까? 이게 철광석입니다. 이게 한 60% 이상 되는 겁니다. FE가. 그런데 고품위 광석이죠. 들어도 엄청나게 무겁고 비중이. 또 자석 때문에 굉장히 세게 붙죠. 철 함유량이 높을수록 높은 품질을 자랑하는데 이들은 자석에 강하게 붙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지하의 철광석 품질이 우수하다는 것은 지표의 철광석도 동일하다는 의미다. 고대의 사람들이 지표에서 철광석을 노천 채굴했던 자리를 맥 즉 노드라고 부른다. 우리가 서 있는 부분은 이 부분이고, 이 부분이고, 노드가 나왔던 부분은 이 부분이고, 여기서부터 지하로 계속 캐가지고 이렇게 계속 이렇게 여기까지 이렇게 캤던 부분이죠. 고대에는 현재의 갱도처럼 지하 깊숙이 내려오지 못하고 지표 부근의 철광석을 활용해 제철의 원료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드가 노출된 이곳에서는 지표의 층이 낮아질 정도로 철광석 채광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진 상태라고 한다. 아까 보신 갱도하고 다르게 이쪽 지역은 지표에서 아주 가까운 데까지 철광석을 많이 캐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집안의 침하 위험성이 있었던 겁니다. 얼마나 많았던지? 한 20m 여기 지하로 한 20m 레벨까지 지금 아주 가까이까지 채굴한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물금광산을 발견할 수 있었던 단서도 오랜 옛날부터 노드에서 철광석을 채굴했던 흔적 때문이었다. 광산 찾기 전에 여기에 철광석 노드가 있어가지고 주민들이 철광석을 캐서 흔적이 있어가지고 그걸로 인해가지고 우리 물금광산이 찾아진 거 된 건데 지표 부분의 모습을 드러낸 철광석 노드 역시 자석이 잘 붙는 고품위의 품질을 자랑한다. 가야는 철의 왕국으로 발달하기에 적합한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철광석은 어디나 다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데 그 철광석을 누가 철광석인지 알아보고 그 철을 제철하는 기술, 제철을 한 다음에 그거를 단열하는 공장을 거쳐서 무기와 농공구를 만드는 기술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겠죠. 가야는 풍부한 철광석 덕분에 철의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지리적인 이점만으로 철기 문화를 꽃피운 것은 아니다. 그 토대는 바로 기술력이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선생님? 여기가 저희가 발굴을 했던 가게리 제철 유적입니다. 실제로 발견된 작업의 흔적이 없어 오랜 시간 의문으로 남아있던 가야의 제철 관련 활동. 2009년 이곳 하길이 농공단지에서 제철과 관련된 집단의 생활유적이 출토되었는데 금석을 뽑아내는 재련로 한기와 광물을 산화광물로 만드는 화로인 배소시설이 함께 발견되어 가야의 제철기술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연구되고 있다. 지금 단 한 기기만 확인이 되고 있고 지금 한 번 사용을 했지만 한 번만 사용을 하고 끝을 낸 건 아니고 한 3차 정도까지 사용을 한 것으로 지금 확인이 되고 있는데 철기의 양을 따지기에는 조금 많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당히 소규모니까 크게 여기서 나온 양을 가지고 얼만큼 됐다고 지금 판단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밖에 2010년에는 김해시 상동면 우계리 도로 부지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철 생산 유구가 출토되었는데 재료를 위해 사용된 숯감화와 더불어 슬랙의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제철 유적들이 금강가야의 중심부인 김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철 생산이라는 것은 상당히 최첨단 산업 중에 하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중심지보다는 조금 외곽 쪽에서, 엄폐된 곳에서 입지를 해서 사용을 해서 제철 유적이라는 게 주변 입지를 많이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옆에 철광산지도 주변에 있어야 하고 원료로 쓰는 나무로 쓰는 뗄감도 주변에 입지를 하고 있는 그 주변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고대의 최첨단 산업, 철 생산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을까? 외부로부터 기술력을 보호하기 위해 은폐된 곳에서 진행되었을 정도로 가야인이 중요하게 여겼던 철의 생산 그들은 어떻게 철을 생산하고 생산한 철로 무엇을 만들었을까?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전통방식 그대로 황토벽돌로 재련로를 만들고 참수출 연료로 삼아 철 생산 과정을 재현해 보았다. 철 생산 재현에 사용한 원료는 가야의 영태였던 경남 경북지역에 많이 매장되어 있는 철광석. 그 중에서도 김해지역에서 만날 수 있는 자철광이다. 자철광의 성질이 우리나라에 분포되어 있는 것들은 철함량이 비교적 높다. 약 50% 정도. 돌, 암석과 비율이 약 50% 정도의 철함량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산화물이지 금속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그래서 이것을 화학적으로 변화시켜서 환원시켜서 재연을 했을 때 얻어지는 게 금속이에요. 자연상태의 철광석은 철과 산소의 화합물인 일종의 산화철 덩어리다. 철광석의 산소를 제거해야만 철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위해 철광석을 가열하는 과정을 재련이라 한다. 목탄을 썼습니다. 현대에서는 목탄 대신에 코크스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료가 서로 다릅니다. 1차적으로는 열론을 가열해서 온도를 올리는 데 목적이 있고 2차적으로는 다시 철 속에 철 샘물 속에 목탄이 들어가서 탄소와 화학금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소위 과학적으로는 가열 온도를 올리는 목적도 있지만 발열 반응을 일으키는 목적도 있지만 두 번째는 철 속에 탄소가 들어가서 철이 녹는 온도를 낮춰주고 나중에는 탄소가 있음으로써 강도를 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산하철은 수출 태울 때 발생하는 일산화탄소와 활발하게 반응한다. 일산화탄소가 산화철의 산소를 빼앗고 산소가 빠져나간 철광석에는 철 성분만 남는 것이다. 온도가 약 1400도 정도, 최소 1300도 정도 상승시켜놓고 이 속에 들어간 산화철이 숯이 연소되면서 나오는 가스, 탄산가스라든가 이런 탄소의 성분에 의해서 이렇게 산소를 빼앗겨가지고 다시 환원돼가지고 금속 본질로 돌아가는 거죠. 그게 바로 환원작업인데 이 같은 환원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비중이 낮은 불순물인 철찌꺼기들이 배출된다. 그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미세한 방울들이 밑으로 내려가면서 밑으로 내려가면서 이제 온도가 높아지니까 바람구멍 앞 근방에는 이 로이 하후 아랫부분 온도가 높아지니까 그것들이 응집이 되죠. 서로 아주 작은 분리. 이 쇳방울들이 자기들끼리 엉겨붙어가지고 로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것들은 무거우니까 밑으로 가라앉고 온도가 더 올라가고 로가 열을 받아가지고 온도를 발산하게 되면 그것들이 탄소를 먹어서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하고 쇳물이. 그 과정에서 쇳동 슬래그는 자꾸 배출되어야 돼요. 좋은 철광석이란 철 성분이 풍부한 것을 의미한다. 즉 철광석에는 철 이외에도 자연상태에서 생성될 수 있는 다양한 성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활원작업을 통해 산소뿐만 아니라 기타 불순물들을 배출하며 순수한 철 성분만을 남기는 것이다. 대개 재련로의 온도가 500도에서 600도 이상이 되면 환원이 시작되고 이때부터 찌꺼기가 녹아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슬래그가 슬래그 설명을 제가 해드릴게요. 이 슬래그 이처럼 먼저 녹아내린 철 찌꺼기들을 슬래그라고 부른다. 투입한 철방석이 잘 환원이 되고 용해가 돼서 철은 철대로 분리가 되고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누적이 돼서 쌓이고 바람구멍 앞으로 그리고 슬래그는 발생돼서 이제 밖으로 빠져줘야지 안 그러면은 로 바닥이 꽉 차게 되니까 지가 가지고 있는 로가 가지고 있는 수명을 다하지 못하지. 그 로 바닥을 다 잠식해버리니까 위에서 투입해봐야 바람구멍 막히고 그래서 이런 배설이 돼야죠 한마디로. 위에서 먹은게 밑으로 배설되고 자기 수명을 다 충분히 수명대로 작업이 되어야 하는데 슬래그가 나왔다는 것은 제철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거죠. 1,300도 이상의 고온으로 달궈진 재련로 안에는 본래의 원료인 철광석, 즉 자철광 안에 산소와 슬래그가 빠져나가고 철 성분 만이 남아있는 물질이 들어있다. 이 물질이 바로 고온의 환원 과정을 통해 1차로 생성된 최초의 철이다. 이 최초의 철을 환원철 또는 괴련철이라 부르는데 환원철 역시 아직까지는 불순물이 많이 남아있는 잡쇠 덩어리 상태다. 환원 과정을 거쳐 재련로에서 나온 환원철은 탄소 함유량에 따라 연철, 강철, 선철로 구분한다. 고대 제철의 환원철은 대부분 탄소 함유량이 높은 선철이며, 선철은 탄소 함유량이 높아 단단하지만 모양을 변형시키기 어렵고 쉽게 부러지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이 선철들을 모아서 필요한 형태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거를 좀 생산을 많이 해가지고 이렇게 쌓고서 녹여서 이렇게 응착시킨 다음에 좀 꺾어접고 하는 작업으로 하게 되면 이제 덩이새가 되는 거죠. 중간 소재. 강철이 되는 거죠 이제는. 이건 이제 기초작업이라고 보면 되죠. 잡새 덩어리인 환원철은 다시 불에 넣고 달구고 두드리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비로소 단단한 강철로 거듭난다. 이 과정을 정면 단야라고 한다. 뛰어난 제철 기술이란 원료에서 철 성분을 뽑아내는 재련 기술과 이 철을 달구고 두드려 단련시키는 단야 기술이 합쳐져야만 가능한 고도의 정밀 작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철기술이 문명의 척도가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우리가 철의 왕국이라 불리는 가야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야 하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불순물들이 빠져나가며 보다 단단해지고 깨끗해진 순도 높은 철 강철. 고대사회는 강철을 지배하는 자가 패권을 차지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성은 떨어지지만 옛날에 말에 쇠는 두드려야 된다. 쇠는 두드리라고 많이 두드릴수록 쇠는 강해진다. 많이 두드릴수록 쇠가 깨끗해지고 단련이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대성동 고분에서 만나본 철정이다. 가공과정을 거쳐서 신뢰할 수 있는 중간 소재이기 때문에 이걸 규격화할 수가 있던 거죠. 규격화해서 근수를 재서 형태도 고르게 유통이 가능합니다. 철장은 그 자체로 가야의 뛰어난 제철기술과 당대의 활발한 유통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다. 3차 공정에서 정년을 해서 이제 그 다음 3차 공정으로 가기 위한 소재 첫째 이면서 동시에 이제 고대의 화폐죠 화폐적 기능 그것이 이제 철기 소재 자체가 어떤 화폐적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용도라고 하는 것이 다용도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직접 철기를 만들어서 그걸 가지고서 이제 그 무기나, 전공으로 사용을 하는 부분이 하나 있겠고 그다음에 화폐적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인 교육의 매개물을 이제 수단으로 이제 쓸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철정의 품질은 과연 어떤 수준일까 전통방식으로 제작한 철정을 현대 과학기술로 분석해 보기로 했다. 철장의 표면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철장을 절단해 C편을 제작하는 과정을 거쳤다. 절단한 C편의 표면을 나이탈 용액을 활용해 부식시킨 다음 금속 현미경을 통해 미세 조직을 관찰한다. 미세 조직을 확대해 본 결과 환원철로 제작된 강 소재임이 판단되었고, 현대의 철강 조직에 비해 조밀도가 고르지 못했다. 조밀도가 고르지 못하다는 것은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은 조직이 일정하게 고루고루 일정해야 돼. 강도가 높든 낮든 일정해야 그것이 잘 부러지지 않는데 서로 차이가 나면 힘을 받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힘이 낮은 곳에 불순물이 집적되어 있는 곳에서 균열이 일어나게 돼있어요. 철정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다수의 불순물이 있었다. 하지만 전통 수공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현대의 철관과 비교해봐도 상당히 훌륭한 수준의 철기 소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에서는 아주 명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합단을 했다고 되어있고 우리가 분석한 결과에도 보면 많은 곳에서 도검이 합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수준의 기술로 제작된 가야의 철갑옷. 그 전투력 또한 자연스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사는 왜 가야를 약소국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고분에서 출퇴된 갑옷들이 실전용이 아닌 단순 부장품이라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문의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준 것이 대성동 57호 갑옷이다. 종장판갑의 형태를 갖춘 이 갑옷은 조각과 조각을 연결했을 때 곡면 처리가 되도록 입체적으로 손보는 우수한 단조기술로 제작된 철갑옷이다. 이 대성동 57호 갑옷에서 날카로운 무기류에 찔린 상처 위에 소형 철판을 덧대어 수리한 수리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대성동 57호분 같은 경우에는 X-ray 사진을 찍었을 때 뭔가 모르는 무기에 뚫린 흔적이 확인이 되고 그걸 다시 철판으로 보수한 흔적이 확인이 됩니다. 따라서 물론 장식용으로 이러한 종장판각을 입었을 수도 있지만 실전용으로도 사용했을 것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대성동 57호 갑옷이 실제 전투에 활용한 실전용 갑옷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야 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철갑옷들과 철제 무기류들 중 상당수가 실제 전투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고대 국가로도 인정받지 못한 가야.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강인했다. 금강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 연맹은 중장 판갑이 다량 출투되는 4세기 후반의 전성기를 맞으며 그 세를 확장하고 이 시기에 일본에 완성된 철기 제품을 수출하기도 한다. 중간 소재로 보이는 등잇의 형태로 수출이 많이 됐고 제철 기술이 좀 부족했던 일본 같은 경우에는 그것 말고도 완성된 제품으로도 많이 수출이 됐던 걸로 봅니다. 대표적으로는 철갑옷이라든지 또는 말을 제어할 수 있는 마구 종류 그 다음에 각종 창이라든지 대도라는 무기류 이런 것들이 주로 수출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발견되는 철기 유물들은 가야의 것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 것이 많다. 가야는 뛰어난 기술력을 해외에 수출한 과학적 DNA를 지닌 기능국가였으며 명실상부한 철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가야의 입장에서는 철을 수출함으로써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느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가치의 것들이 분명히 교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아직 대치되는 가치의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불명확합니다. 철기 교역을 매기로 맺어진 가야와 일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대성동 고분 57호를 통해 당시 가야의 국제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총 16점의 철제 무기와 세구의 미스터리한 여성 순장 인골이 출토된 전형적인 금강가의 지배층 무덤. 대성동 고분 57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보다 과학적인 연구를 위해 고인골 전문가인 김지연 교수를 찾았다. 목이 부러진 인골 위에는 함께 부장된 철집 무기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장품을 묶기 위해 목을 꺾어서 매장한 인골. 인골의 신분이 부장품보다도 낮다는 의미일까? 이 인골의 정체는 무엇일까? 실제 57호분에서 출토된 인골의 두개골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두개골의 경우에는 미간에서 턱 부분까지의 길이 또는 광대뼈와 광대뼈 사이의 폭을 수치화한 데이터 등을 통해서 개통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길이에 비해서 폭이 늘다는, 폭이 더 늘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랑 차이점들이 57호분 출토인골과 현대 표준인골의 수치를 비교해 보았을 때 어떤 차이를 보일까? 이 턱 부분까지 길이, 그다음에 이것과 함께 이 폭, 이 광대뼈와 광대뼈 사이의 최대로 벌어지는 이 폭, 이러한 것들은 만들어지니까 참 힘드네. 이 길이가 대략 124. 여기 이쪽은 남성이고 이쪽은 여성입니다마는 여기서도 역시 얼굴 전체에서 이 이목구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길게 또는 또 코의 폭의 길이에 비해서 폭이 좁게 나타난다든지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우리의 현대인들의 얼굴이죠.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여기에 보시는 대성동에서 나온 인골이 같은 경우에는 물론 여성임이나마는 이쪽과는 조금 다르게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아래로 모여서 그래서 마치 얼굴 전체가 이렇게 좁게 보이는 그런 형태를 하고 있다 하는 말씀이 57호분의 인골들은 눈, 코, 입이 아래쪽으로 몰려있고 이마가 넓으며 하악골이 좁은 편인데 이는 일본 지역의 고인종과 유사한 계통이다 실제로 중국 후한서에는 왜의 왕이 철 교역을 트기 위해 후한의 황제에게 인력을 바친 기록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가야로부터 철을 제공받은 왜에서 그 대가로 인원을 제공했고 그 인원들이 무덤의 주인을 따라 순장되었을 가능성도 추측해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처럼 강성했던 철의 왕국 가야는 왜 통일된 중앙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연맹체 상태로 남아 있었을까? 풍부한 철로서 유지될 수 있는 나라 체제가 굳이 뭉쳐서 하나라고 하는 복합된 큰 국가로서 발전할 수 있는.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지 않았겠느냐 즉 경제적 기반이 철회에 있고 그 다음에 일본과의 교육을 통해서 정말 노예라고 하는 많은 인적자원 당시의 생산자원을 갖다가 확보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라면 각 나라들이 굳이 하나로 뭉쳐서 서열관계를 유지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지 않았나 국제적으로 명성을 드높였던 철의 왕국 가야는 532년에 금강가야가 장악했던 전기 가야 시대를 마감하고 그 중심은 고령지역의 대가야로 옮겨간다. 이후 가야의 제철기술은 계속해서 진화하는데 제철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철상감기법으로 제작한 환두대도가 대표적이다. 승자가 기록한 역사 속의 영토는 사라졌어 제철 왕국의 혼과 기상은 고스란히 남아 전달되고 있다. 철의 왕국 가야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단계다. 보다 과학적인 탐구가 이뤄질 때 미안의 역사를 새롭게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의 경우에는 그렇게 많은 철이 생산됐고 분명히 부장되고 하는 발달된 철기문화의 어떤 수준을 보여주면서도 불구하고 그 부분 재강에서 초강기술에 대해서만큼 아직 충분히 분석적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 그런 부분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혜의 자원과 고대의 제철기술을 토대로 한반도를 넘어 북방과 외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졌던 철회사업. 철의왕국 가야의 꿈 소국 연맹체로 남아있던 약소국 가야의 역사는 현대의 시각으로 추적해본 과학적 탐구를 통해 화려한 철기 문화를 꽃피워 강력한 철기 군단의 신화를 세운 철의왕국 가야로 새롭게 기록되었다. 과학은 역사를 열어주는 또 하나의 창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첨단 과학의 눈을 빌려 숨겨진 역사의 새로운 진실과 대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