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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정세와 통일

안녕하세요. 림쌤의 10분 역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역사학습 가이드 림쌤입니다.

오늘부터는 새롭게 2단원 남북국 시대에 대해 살펴볼 건데요. 중3 친구들 준비되셨죠? 그럼 바로 2-1 신라의 삼국통일과 바래의 건국부터 출발해 볼까요?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삼국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공부했었는데요. 오늘은 과연 신라가 어떻게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지 그 과정부터 같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삼국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6세기 후반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드디어 혼란의 중국을 통일한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수나라인데요.

수는 분열되어 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말리장성 이북의 돌걸을 제압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던 말갈과 거라는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요. 이에 고구려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한편 백제는 이 시기 신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기억나시죠?

진흥왕의 배신과 성왕의 죽음으로 나제동맹이 완전 박살났잖아요. 이에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고자 고구려와 수의 상황을 지켜보며 두 나라 모두와 친성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에게 고구려를 정벌해달라고 요청하는 등 수와 친선관계를 맺고자 노력합니다.

이러한 국제정책 속에서 고구려와 수의 대립이 시작되는데요. 고구려가 먼저 말갈과 거란의 이탈을 막기 위해 요서지역을 선제공격하자 이에 수는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홍수와 풍랑 등 자연재해로 인해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실패하는데요.

문제의 뒤를 이은 수의 양재는 보다 적극적인 탱창정책으로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구려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죠? 고구려는 거센 저항으로 요동성 등을 지켜내는데요.

고구려가 쉽게 뚫리지 않자 수의 양재는 우중문에게 별동대를 주어 평양성을 막바로 공격하게 합니다. 이러한 수의 공격에 맞서 고구려의 승리를 이끈 인물들이 있는데요. 먼저 고건무입니다.

이 고건무는 후일 영류왕이 되는 인물로 수의 장군 네오아가 이끄는 수의 군대를 평양 부근에서 격퇴하고요. 을지문덕 역시 수의 별동대를 살수에서 크게 격퇴합니다. 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워낙 유명하잖아요. 이때 을지문덕은 수해 장군 우중문에게 거짓 항복의 내용을 담은 시를 보내 우중문을 조롱했는데요. 신묘한 계책은 로 시작되는 문구를 보시면 바로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을 떠올리셔야 됩니다.

요거 시험에 잘 인용되니까요. 잘 기억해 두세요. 암튼 이때 을지문덕의 활약으로 수해 군대 30만 중에 살아 돌아간 이가 2700명밖에 안된다고 하니 정말 고구려의 대승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렇게 고구려에게 박살이 난 수는 결국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고 이를 계기로 멸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당은 초기에는 고구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역시나 대외 팽창 정책을 펼치며 고구려를 견제합니다.

특히 당 태종의 집권 이후 당은 더욱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했는데요. 이에 고구려는 당을 막기 위해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축조합니다. 이 천리장성은 부여성에서부터 비사성까지 이어 만든 것으로 장장 16년에 걸쳐 완공하는데요.

이러한 천리장성의 축조 과정에서 최고 감독자로 급부상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연계소문인데요. 이러한 연계소문은 결국 정변을 일으켜 기존의 왕과 귀족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왕의 자리에 보장왕을 앉힌 뒤 자신은 고구려의 최고 간직인 대망리지에 오르는데요.

이때 왕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대망리지인 연계소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자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있던 당은 연계소문의 정변을 구실삼아 고구려를 침략하는데요. 이러한 고구려와 당의 싸움은 초기에는 당이 우세했습니다. 당의 공격에 고구려의 요동성과 배감성이 차례로 함락하며 위기가 찾아왔는데요. 하지만 고구려가 어떤 나라입니까?

또 한 번 나라를 지켜내는데요. 고당전쟁의 하이라이트인 안시성 싸움 중요합니다. 이 고구려는요 안시성에서 무려 3개월 가까이 거세게 항전하는데요. 전쟁이 장기화되면 손해를 보는 건 침입한 쪽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 물자가 부족해지고 점점 지쳐가는 거죠. 특히 고구려는 전쟁이 일어나면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식량이나 우물 같은 건 전부 없애버리고 모두 성 안으로 꼭꼭 숨어버렸다고 하는데요. 결국 추위와 식량 문제로 당군은 퇴각하고 당의 고구려 침략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처럼 고구려가 당의 군대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잘 설계된 고구려의 성곽 덕분이었는데요. 철통같이 방어한 고구려의 철옹성을 당은 결국 뚫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수당전쟁에 고구려가 힘이 많이 빠진 것도 사실인데요. 이러한 결과는 이후 고구려 멸망에도 영향을 줬겠죠. 이 고구려의 멸망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만 뒤로 미뤄두고요.

우리는 7세기 백제로 떠나볼까요? 진흥왕의 배신으로 성왕이 간산성에서 죽고 난 다음 백제와 신라의 끈끈한 나제동맹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백제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7세기 초 무왕 때부터 신라에 대한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요.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권초 아주 파이팅 넘치게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먼저 의자왕은 고구려와 손잡고 신라의 당황성을 공격하는데요. 이 당항성은 한강 유역에 위치한 성으로 신라와 중국을 잇는 중요한 거점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당항성을 공격해 신라와 당의 연결을 차단한 의자왕은 신라에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대야성까지 공격하게 됩니다. 이 대야성 전투가 상당히 중요한 전투인데요. 이러한 대야성 전투가 일어난 해는 642년이었습니다. 이 연도를 외우실 필요는 없지만요.

이 642년은 삼국의 판도를 바꾸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642년 먼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던 해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연계소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고요. 백제는 의자왕대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라에 대한 맹공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선덕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요. 백제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백제는 대하성을 공격하는데요.

이 대하성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한 중요한 성입니다. 이러한 대하성이 결국 백제에 의해 함락되고 성주 역시 죽임을 당하는데요. 이 대하성의 성주가 바로 김춘추의 사위입니다. 이때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동시에 잃게 돼요.

그러니 백제가 얼마나 미웠겠어요. 복수는 복수를 낳는 거죠. 자국의 위기일 뿐 아니라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김춘추에게 백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대상이었지만 당시 신라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고구려의 도움을 요청하는데요. 이에 영계소문은 도와줄 테니 대신 한강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에요.

결국 김춘추는 648년 당으로 넘어가 당에 도움을 요청하는데요. 당에서는 고구려를 다시 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이 당태종이요 안시성 싸움에서 지고 굉장히 빡쳐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김춘추가 딱 찾아온 거죠. 오케이 협상이 성립되고 나당연합이 결성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는 건데요. 먼저 백제의 멸망입니다. 신라를 공격하며 승승장구하던 백제는 지배층의 분열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요. 이에 백제의 국력이 쇄약해지자 이 틈을 타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과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대군을 막아내기엔 백제의 힘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의자왕은 계백에게 5천 결사대를 주고 신라를 막으라고 하지만 아무리 계백이라고 5천이 5만을 이길 순 없겠죠. 결국 계백 장군이 이끄는 오천결사대는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요. 기벌포에 상륙한 당군이 신라군과 함께 사비성을 포위하고 압박해오자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합니다.

하지만 이후 백제의 부흥을 꿈꾼 사람들이 있는데요. 백제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는 먼저 흑치상지가 있습니다. 이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활약한 인물로 백제의 성 200개를 회복할 만큼 세력을 떨쳤고요.

또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에서 왕자인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해 백제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부흥운동은 무려 4년간이나 지속됩니다만 지도층의 분열로 몰락하기 시작하는데요. 결국 백강전투와 주류성 전투의 패배로 백제의 부흥운동은 끝나고 맙니다.

이때 백강전투에서 백제의 부흥을 도왔던 나라가 있는데요. 바로 외입니다. 이때 외에서 무려 4만 대군을 파병했다고 하니 백제와 외의 관계는 정말 끈끈했던 것 같죠?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살펴볼까요? 고구려는 안시성 싸움 이후에도 끊임없는 당의 공격을 받았지만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연계소문이 이를 다 막아냅니다.

하지만 665년 영계소문이 죽고 난 뒤 상황이 바뀌는데요. 영계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이 치열한 권력다툼을 하면서 고구려는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기회를 틈타 당군은 요동을 공격하고 신라는 평양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는데요.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고구려 역시 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요. 고연무와 건모잠이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해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전개하지만 이 또한 결국 지배층의 분열로 실패하고 맙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운 나라는 다름 아닌 신라인데요. 지들이 망하게 하고선 갑자기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왜 도와주나 싶으시죠? 이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신라와의 약속을 깨고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욕심을 드러내기 때문인데요. 이에 신라가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왔던 겁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한반도를 모두 차지하고 싶었던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함은 물론 신라의 금성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는데요.

이에 신라는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백제의 옛 땅을 설치한 것입니다. 백제의 유민에게 관직을 주어 민족 통합을 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벌이던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해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부흥군과 함께 신라가 당을 선제공격해 나당전쟁을 일으키는데요. 이후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당은 결국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철수하고요. 신라는 마침내 삼국통일을 완수합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 뭔가 찝찝한 통일인데요. 그 의의와 한계에 대해 같이 한번 살펴볼게요. 먼저 의의는요. 백성을 하나로 아우르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걸 들 수 있고요.

또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결국 당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다는 것도 의의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역시 의의보다는 한계가 많은 통일이었는데요. 먼저 외세의 힘을 빌려서 이룬 삼국통일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잃었어요.

대동강 이북으로는 모두 당에게 넘어갔는데요. 이처럼 영토 손실이 많았던 반쪽짜리 삼국통일이라는 것도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지는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두고 여러가지 견해가 많은데요.

외세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신라의 외교는 자국을 생각한 현실 외교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참 여러 가지로 생각할 내용이 많은 파트인데요. 스스로 한번 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정리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자 이렇게 한반도 남쪽으로는 신라가 통일을 완수했고 북쪽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은 고구려의 왕과 지배층을 중국 각지로 이주시켰는데요. 이때도 이름을 떨친 고구려의 유민들이 있습니다. 고문간과 고선지, 이정기 등인데요.

먼저 고문간은 몽골 초원에서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떨친 인물이고요. 고선지는 당군을 이끌고 서역 원정에 성공한 인물입니다. 또 이정기는 산둥반도 일대의 책임자로 4대에 걸쳐 산둥반도를 다스리기도 했는데요.

역시 고구려인들은 저력이 있네요. 한편 당은 대조영을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을 요서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요. 이들이 당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돌거리 당에게서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때를 틈타 거란 역시 당에게 반란을 일으키는데요. 이 거란 때문에 당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만주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당군의 추격이 있었지만 추격해온 당군을 무찌른 대조영은 마침내 698년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바로 발해입니다. 이 발해는 명실상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우리의 역사입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 대부분이 고구려인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는 이곳저곳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특히 발해의 문항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보면 스스로를 고려의 국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려가 바로 고구려인데요.

이렇게 바레의 왕이 스스로를 고려의 왕이라 칭한 것은 정말 결정적으로 바레가 우리의 역사임을 알려주는 확실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바레는 말갈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본인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억지 주장에 맞서 우리의 역사 바레를 잘 지켜내야겠죠?

이처럼 북쪽에는 바래가 있고 남쪽에는 신라가 있어 이 시기를 우리는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이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조선우기 실학자 유득공입니다. 유득공은 자신해져서 바래고를 통해 바래를 재조명한 인물이니까요. 잘 기억해 두시는 게 좋겠죠?

오늘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바래의 건국에 대해 공부해봤는데요. 오늘 준비한 내용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의 중요 포인트! 6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의 삼국의 상황을 잘 파악하시고요.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은 순서를 중심으로 잘 기억해주세요. 또 고구려의 멸망 이후 건국된 바래까지 잘 정리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고요. 구독과 좋아요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그럼 안녕!

뿅!